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모솔새 Jul 07. 2021

비가 오든 안 오든, 집에는 못 가

공무원의 태풍, 호우, 대설 비상근무

태풍 '매미'가 왔던 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둘이서 집에 남겨졌다. 새벽에 빗소리에 깨어 일어나 보니 엄마는 집에 안 계셨고, 집에는 동생과 나뿐이었다. 키가 잘 닿지 않는 화장실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였던 풍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분명 낮에만 해도 보이던 길은 온데간데없고, 창밖에는 검푸른 물결만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밤에 엄마가 어린아이들을 두고 나가야 했던 건, 태풍 특보가 내렸기 때문이었겠지. 오늘 이곳에도 호우주의보가 발효되었다. 기상청을 거쳐 군청에서 날아오는 재난문자에 직원들은 희비가 엇갈린다. 태풍, 호우, 대설 특보가 발효되면 직원들은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단계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 직원의 1/3 또는 1/2가 근무하게 된다. 


근무 중에 특보가 발효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문제가 되는 건 퇴근 이후 또는 주말에도 해제가 되지 않을 경우다. 퇴근하는 직원도 맘이 편하지는 않다. 퇴근 못하는 직원은 몸이 불편하다. 하늘이 어떻게 변할지는 기상청 직원도 모르기에, 직원들은 각자 계산에 돌입한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 수 있을까? 밤샘을 하게 될 것인가? 퇴근하는 직원도 이 비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언제 호출될지 모르니 두 발 뻗고 자기엔 글렀다. 


더 심각한 건 새벽까지 근무했지만 8시간이 채 되지 않는 경우다. 이런 경우 대체휴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지치고 젖은 몸을 이끌고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정상 출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을 태풍이 유난히 많았던 작년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


평소 쓸 일 없던 TV는 재난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재난 특집 방송을 틀어놓으면 사무실은 비로소 비상 태세가 갖추어진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배달음식이 웬 말이며 식당은 문을 열 리 없고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하니 먹을 거라곤 컵라면뿐이다. 그렇게 재난방송을 시청하며, 민방위복을 입고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저녁에도 있을 예정이다. 전국의 지방직 여러분, 힘내요.


사무실에 나와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공무원도 사람이라 위험한 건 마찬가지니까. 대신 상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그 대응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근무하는 것이라 배웠을 뿐이다. 내가 근무하게 된 이후로는 '매미' 때와 같은 극한 상황이 없었으니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사실 백 번 양보해서 비상근무를 하는 건 괜찮다. 정말로 바라는 건, 비가 조용히 지나가는 것. 다치는 사람도 가축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거야말로 하늘의 소관이니 사람은 그저 기도할 따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은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