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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Aug 23. 2021

신청서 하나 쓰는 게 뭐 어렵다고

그럴 수도 있구나

나는 첫 발령지에서 민원 업무를 맡게 되었다. 처음 민원대에 앉아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신청서를 받고 민원서류를 발급하는 일이었다. 요즘은 간단한 민원은 전부 전자서명기에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여전히 신청서를 받아야 하는 업무도 존재했다. 


사람들은 신청서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더러 대신해 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 신청서 글씨가 너무 작아서, 신청서가 너무 복잡해서, 손이 떨려서, 글 쓰는 속도가 느려서... 이유도 다양했다. 신청서는 법정서식이라 글자가 작은 건 내가 해결할 수가 없었다. 손이 떨리거나 속도가 느린 경우는 괜찮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천천히 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신청서가 복잡한 건 사실이라 나는 나름대로 예시도 만들어보고, 꼭 작성해야 할 부분만 연필로 표시를 해 드리기도 했다. 얼마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간단한 민원이라 전자서명기에 이름 석 자만 적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서류를 떼러 오신 어르신은 손이 떨린다며 글자를 잘 못 적겠다고 하셨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떨려도 느려도 괜찮으니 이름을 적기만 하면 된다고. 그 말에 어르신은 주저하다가 말씀하셨다. '내가 글자를 몰라서...'


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교실이 있다는 건 알면서. 

 

작은 글씨도 복잡한 신청서도 진정한 문제가 아니었다. 글자 자체가 문제가 되었던 거다. 나는 그 이후로 신청서를 받을 때마다 조심스러워졌다. 이 분이 정말로 손이 떨려서 떨린다고 하시는 건가, 아니면 글자 쓰기에 자신이 없으셔서 그러시는 건가. 받침 글자를 헷갈려하실 때엔 어떻게 기분 상하지 않게 알려드려야 하나. 그런 고민들이 생겼다. 


글자 쓰기에 자신감이 없어서, 혹은 쓸 수 없어서, 쓸 줄 몰라서... '쓰는 건 아가씨가 대신해 줘.'라는 말에 나는 좀 더 부드러워지고 짜증을 덜 내게 되었다. 그게 단지 자기가 쓰기 귀찮아서 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


면사무소에 가끔 일을 보러 오시는 여자 어르신이 계셨는데, 어느 날은 남는 신문을 좀 얻어 갈 수 있겠냐고 하셔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저번에 보낸 공문도 직접 읽고 찾아오셨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내 인상에 깊게 남은 것은 따로 있다. '저 할머니는 대학을 나왔다더라, 그래서 신문도 읽을 줄 안다.'라고 하시던 다른 어르신의 부러움 섞인 눈길이었다. 


요즘 우리나라는 낮은 문맹률에 비해 실질 문해력 수준이 떨어진다는 기사를 종종 본다. 실질 문해력이야 그런지 몰라도, '낮은 문맹률'이라는 말이 요즘은 영 의심스럽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하다. 실제보다 그 수치가 낮게 평가된다면 글자 읽고 쓰기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더 나오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신청서를 쓰는 게, 문자를 읽고 쓰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는 사회에서라면 신청서를 앞에 두고 마음 졸일 일도 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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