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反日)이라는 인식의 틀을 배제하고 우리는 위안부 역사에 관하여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영화 Apology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이다. 얼마 전 BBC 인터뷰에 귀여운 아기들의 깜작 등장으로 유명세를 치른 로버트 켈리 교수는 한국에서 반일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영역에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위안부 문제를 반일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그 시도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붙은 "21세기의 금서"라는 표현은 한국에서 반일의 틀이 아닌 제3의 시각으로 식민지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위안부 서사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먼저, 영화는 한국, 필리핀, 중국 3개국 피해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 식민지 역사로 국한시키지 않고 태평양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시간에 위치시킨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에 한 중국계 영국인 친구가 다른 국가와 달리 왜 한국에서만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가 잘 되는가란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피해의 규모와 식민지 역사를 감안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동안 이 문제가 반일이라는 틀 속에서 우리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상처를 어두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영화의 특징이다. 여기에서 영화는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기존의 방식을 넘어선다. 즉, 위안부 문제를 아픈 역사의 시간을 호명해 반일감정을 공고화하는 방식으로만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역사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상처에 주목한다. 남편이 죽을 때 까지도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치유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아델라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위안부 문제의 또 다른 결을 마주하게 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위안부'라는 키워드로 기사를 검색해 보면 바로 이 "또 다른 결"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정대협을 중심으로 이슈화되기 이전까지 위안부란 말은 오늘날 흔히 쓰이는 용례와 다르게 사용되었다. 그것은 주한미군 부대 주변에서 일하는 접대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몇몇 기사들을 보면 언론이나 사회가 그녀들을 얼마나 백안시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우리 안의 위안부 이야기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 '꽃'들에 관한 인권보고서 편>에서 방송된 적도 있다.
90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가 민족감정과 연결되면서 기지촌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위안부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역사 속의 피해자를 오늘날의 투사로 호명하는 과정에서 기지촌 여성이란 의미는 위안부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왜 언론과 호사가들이 박유하 교수의 글에서 '자발적'이란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자발적'이 사실이라면 그녀들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달리 평가할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인 셈이다.
요컨대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란 군국주의에 의해 수행된 실체적 폭력과 가부장적 사회문화가 가한 인식의 폭력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역사의 일부로 소환하는 방식은 그녀들을 가부장적 사회의 인식적 폭력에서 다소나마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인식은 위안부란 이름으로 소환되지 못하는 또 다른 '위안부'들의 상처를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배제하는 기제이기도 한 셈이다.
결국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역사 속에서 겪었던 폭력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여성 일반으로 재생산되는 폭력의 사회문화적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문화적 구조를 이해하고 해체하기 위해선 외부의 폭력뿐 아니라 우리 안의 폭력에도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p.s. 이 영화를 "세종대 박유하 교수가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소개한 어느 신문기사가 떠오른다. 책을 읽었다면 과연 저런 조롱을 하는 치기를 부릴 수 있었을까? "아무 말 대잔치"는 독백이나 다름없는 내 브런치 같은 곳에나 어울리지 신문지상에서 할 일은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