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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박도 Apr 11. 2021

적들은 꺼져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신 볼 일 없는 이에게 속수무책으로 언어폭력을 당한다면. 


뉴욕에 도착한 후 통장을 만들려고 은행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은행원 아줌마는 통장이 다 만들어진 후에도 내 신상 정보를 캤다. 직업을 묻기에 퇴사 후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줌마가 말했다. 


“한국에선 개나 소나 책 쓴다면서요? 요즘 책들 읽을 만한 것도 없고~ 안 그래요?” 

눈으로 나를 쭉 훑는 게 심상치 않더니만 ‘이 사람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나보다. 시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나를 ‘개’와 ‘소’로 지칭했다 이거지. 


“그쵸. 요즘엔 누구나 책을 내는 경향이…….” 개였다면 짖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반성형 자존감 바닥 찌질이라서 반박은커녕 그 말에 동의해주었다. 


타인의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자람이 어디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 모른 채 입을 연다. 남에게 상처를 줄 거로 생각하지만 불쌍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남들이 하는 걸 하찮고 우습게 보는 태도를 보면 정작 그 자신은 그 일을 해보지 못했거나 하고 싶어도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책을 내고 나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책을 내면 작가 본인이 책을 잔뜩 사서 주변에 선물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라던데 사실 그때 (물론 지금도) 내 책을 수십 권이나 살 돈이 없었다. 친한 친구들에게만 책이 나온 걸 조용히 알렸다. “아, 내가 책을 줘야 하는데…….”라고 덧붙였지만 빈말이었다. 친하니까 한 권 정도는 사줄 거라 믿었다. 책을 구매한 권 수는 나름 우정의 징표였다. 여러 권 구매한 친구일수록 베스트 프렌드로 임명했다. (초딩이야?) 그런데 그 시기 표양의 말 한마디는 우정의 마지막 인사말이 되었다.  


“니 책? 아직 안 샀는데? 사야 돼? 당연히 니가 줘야 되는 거 아냐? 줘도 읽을까 말까인데?” 


오래 친했던, 혹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에게 내 책이 어땠냐고 물으니 돌아온 답이 고작 이런 거라니. 하도 책 많이 팔렸냐, 얼마 벌었냐 물으며 관심을 보이기에 당연히 읽었을 줄 알았는데. 잘 가.


시간으로 따지면 읽는데 30초도 되지 않는 한 문장의 말들, 그게 뭐라고 내 기분을 들쑤시도록 내버려 두며 살았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 동안 그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길고 긴 대화보다 찰나의 말에 더 아파했다. 키보드로 파바박 오가는 말들에는 깊숙한 진심이 없다. 얼굴을 맞대고 날이 밝는지도 모르고 나누는 대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설명하고 이해하면서 대화는 길어진다. 짧은 대화에선 이해 또한 얕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들은 이제 그만 꺼져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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