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괜찮지 못한 인간> / 박도 지음
돈 벌기 시작하면서 사람 사이를 계산하게 된다. ‘내가 더 썼냐, 네가 더 썼냐’, ‘내가 저번 경조사에 얼마를 냈는데 너는 고작 이거? 친구도 아니네. 절교할까.’ 으 제발 좀 그만. 속으로 계산하고 따지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 ‘이게 다 없이 살아서 그래.’라고 자위해봐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스무 살에는 계산적이지 않았다. 계산한다는 건 일단 낸 돈이 있다는 건데 모두가 가난하던 스무 살에도 나는 주로 얻어먹는 쪽이었다. 공평하게 계산하자고 나서면 할 말이 없었다. 계산적일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낫겠다.
남자 지료와 푸소는 내가 외모와 성격은 남자인데 돈 낼 때만은 김치 아니 돈을 먹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영 고까워했다. (누가 달가워하겠냐마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을 때도 천 원 한 장 없었다. “야 나 진짜 돈 없어. 빌려줘. 내줘. 나중에 살게.” 참 찌질하다.
‘어떻게 돈 만 원도 없냐?’. 이 말은 진짜 그 돈이 없는 사람에겐 실례가 될 수 있다. 없으려면 500원도 없는 것이 소수의 돈 없는 특권층에게 부과된 프라이빗한 경험이자 일상이다. 나는 돈만큼 자존심도 없었다.
“아 그냥 좀 사줘!”라고 말하고 붕어싸만코를 골랐다. “야 시발 붕어싸만코는 안된다고!!!!” 푸소가 소리쳤다. 나는 느낌표가 끝난 즉시 포장지를 얼른 뜯어서 싸만코의 머리 부분을 크게 깨물어버렸다. 대체 무슨 짓인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라 이상한 성격을 지닌 사람 같다. 뿌연 뽀샤시 효과가 적용된 청춘필터를 감안하더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때의 나를 좀 잊고 싶다. 왜 그렇게 돈 없이 당당하고 이상하게 살았나 모르겠다. 대단하다. 대단해.
과외, 편의점알바, 수학학원 알바, 논술채점 알바, 빵집 알바, 청바지회사 단기계약직 등 학업을 등한시하면 했지 돈을 등한시한 적은 없다. 엄마한테 돈을 주고 구제 시장 가서 옷 사 입고 술 사 먹다 보니 수중엔 돈 만 원 남아 있지 않던 게 문제다. 제대로 된 친구 생일 선물을 산 적도 없었다. 2만 원이 넘는 건 아예 못 사준다고 봐야 한다. 내 것, 내 가족 것도 못 사는데 친구 선물을 살 수 있을 리 없다. “내 생일이야! (선물 줘)” 라는 말도 부담이었다. “야 한턱쏴”라는 의미 없는 빈말을 듣는 것도 거슬렸다.
그로부터 10년 후에야 돈이 좀 생겼다. 많이는 아니고 먹고살아도 조금 남는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는 뜻이다. 돈이 생기니까 그게 보였다. 돈이 곧 마음이다? “지나가는 길에 왔어”, “지나가는 길에 사 왔어”. 이 두 문장은 고작 한 글자가 있고 없고 차이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두 배로 다르다. 빈손으로 와도 친구는 반갑다. 하지만 붕어싸만코가 든 검은색 봉지를 들고 바스락거리며 들어오는 친구는 그보다 조금 더 반갑다.
정규직이 돼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신용카드는 찌질이도 쿨하게 만드는 무서운 매력이 있다. 돈이 없어도 긁어댈 수 있으니 남에게 돈을 좀 쓰기 시작했다. 팀원들에게 커피를 쏘거나 점심을 샀다. 여행을 가서도 친구들, 동료들 선물을 샀다. 하지만 돈이라는 건 벌면 벌수록 더 쫄린다. 붕어싸만코를 100개를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자 그간 계산할 게 없어 녹슬어버린 머릿속 계산기가 타다다닥 작동했다.
‘내가 저번에 샀으니까 얘가 살 차례 아닌가?’, ‘뭐야, 내가 샀는데 왜 고맙다는 말도 안 하지 서운하네. 내가 얼마를 썼는데…….’, ‘저번에 얘가 여행에서 선물을 사 왔으니까 나도 그 정도의 선물을 사가야 할 텐데.’
없이 살 때의 해맑음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이사한 집에 악벼를 초대했다. 악벼는 빈손으로 왔다. 어차피 가볍게 밥 먹고 커피 마시러 온 것이니 뭐, 괜찮았다. 나도 간단하게 피자나 파스타 정도 요리한 거라서 정말 괜찮았다. 몇 시간 후 배웅하러 나갔다가 근처에 볼일이 생겨 악벼 차에 같이 탔다. 차에 악벼가 산 파리바게뜨 빵들이 잔뜩 담긴 쇼핑백이 있었다. ‘악벼년 뭐냐. 소보로 빵 하나라도 주지. 나는 자기네 집 갈 때마다 뭐 하나라도 사서 갔는데…….’ 이런 거로 왜 배신감을 느끼고 서운한지 모르겠다. 어른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내가 어른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아까운 돈 1위는 축의금이다. 나를 위해 10만 원이 뭐야. 5만 원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데 남한테 그 돈을 줘야 한다니. “친구야, 내가 진짜 많이, 혼신을 다해 결혼을 축하하긴 하는데 5만원만 내면 안 될까.”, “응 안돼.” 친하면 20만 원, 적당히 친하면 10만 원. 그냥 아는 사이면 5만 원 정도 내는 게 마음표현의 룰이란다. 요즘 나는 결혼식장 ATM 기계 옆에 서서 5만 원 짜리 네 장을 뽑아 들고 주머니에서 만지작만지작 거리면서 계산을 한다.
‘10만 원 내도 내 마음을 알긴 알 텐데,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특별한 사이인 거 잊지 말라고 20 넣을까? 에이, 10 정도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니 무난하게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실망할 리는 없을 거야? 그렇겠지?’ 축의금 봉투 앞에서 난제와 싸운다. ‘그래! 결심했어! 10으로 간다.’ 결론은 항상 10이었다.
그마저도 비교적 최근의 고민이지, 한 달 생활비가 딱 20만 원일 때는 결혼식을 안 갈 수도, 친구를 안 볼 수도,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어 괴로웠다. 친구 결혼식에 아이디어까지 낼 일은 아니지만, 축의금을 대체할 만한 행위가 뭐가 있을지 전략을 짰다. 축가나 사회는 자진해서 하겠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고 그럼 주례사? 이건 절교하자는 거나 마찬가지고. 겨우 떠올린 것은 결혼식 영상을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네이버나 유튜브에 올라온 결혼식 영상들을 훑어보니 나도 그 정도는 흉내 낼 수 있겠다 싶었다. 거기다 친구를 잘 알다보니 그 어떤 업체보다 감동을 줄 자신이 있었다. 경쟁피티 하듯 친구를 설득했다.
“로유야, 내가 결혼식 영상 만들어줄게. 그 대신, 있잖아, 그 저기, 축의금은 생략하면 어떨지? 내가 도.. 돈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애써 밝은 척) 헤헤. 이거 업체에 맡기면 10만 원 넘지? 잘해드릴게. 믿고 맡겨보시라니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로유의 친구들과 회사 사람들에게 결혼 축하 메시지 영상을 보내 달라고 해서 거기에 ‘하트뿅뿅’ 효과나 예능자막을 만들어 웃음 포인트를 심었고 신랑, 신부의 예쁜 모습에 짧지만, 감동적인 편지를 넣어 눈물 포인트도 넣었다. 2주 걸려서 영상을 완성했다. 보내자마자 로유에게 연락이 왔다.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펑펑 울다가 웃었다고 했다. 오케이. 축의금값은 했다! 하나의 고비가 더 남아있었다. 속은 찌질로 문드러져도 겉으론 뻔뻔하게 해야 할 때는 바로 식권을 받을 때였다. 겉과 속 둘 다 찌질하면 그건 정말 답이 없다. 내가 해봐서 안다. 무조건 겉으론 큰소리치자. 30년산 찌질이의 팁이다.
로유는 결혼식 하느라 바쁘니까 동생 로윤에게 말했다. “오 로윤쓰. 많이 컸네? 그나저나 나 식권 한 장만~ 하하하 배고파 죽겠다. 영상 만드느라. (이게 제일 찌질)”
결혼식은 잘 넘어갔다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 로유를 만날 때마다 찝찝했다. 여행 갔다가 화장품이나 이런저런 선물을 사서 로유에게 건넸다. 축의금 이상의 돈을 썼으니 다 괜찮은 거로 하자, 싶으면서도 술에 취하면 “내가 있잖아, 축의금 안 낸 거 진짜 미안하다. 영상 만드는 거 그거! 쉬운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축의금은 냈어야 해. 난……. 어떻게든 냈어야…….” 라면서 찌질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아까 겉과 속 둘 다 찌질하면 안 된다고 하신 분)
나중에 종보의 결혼식 영상도 만들었다. 이전 사태를 교훈 삼아 영상 외 10만 원을 봉투에 담았다. 이십년지기 베프에게 적은 돈이긴 하지만 영상 값을 10만 원으로 치면 20만 원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미리 선포했다. 종보는 훗날 내 결혼식에 신상 캔버스백도 아닌 자기가 직접 만든 캔버스백을 선물했다. (브랜드로 사 오지! 정성은 돈으로 줘 #내로남불) 거기다가 종보가 내 결혼식 축가를 불렀는데 그 쉬운 가사를 못 외우고 커닝한 것도 모자라 삑사리까지 냈다. 혹시 축의금에 대한 복수였냐?
아 역시 아직도 나는 계산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