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박도 Apr 11. 2021

엄마가 서른 살이었을 때

에세이 <괜찮지 못한 인간> / 박도 지음

서른이 넘고 나서는 내 나이 때의 엄마를 떠올릴 여유가 좀 생겼다. 엄마가 30대에 진입했을 때 큰 딸인 나는 일곱 살, 동생 고다는 세 살이었다. 엄마는 90년대에 혼자서 두 딸을 키웠다. 동시에 직원 3명을 거느리며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독박육아에 나름 CEO 역할까지 했으니 요즘 말로 ‘파워 워킹맘’ 이었다.

과부는 아니었지만 매일 술(쳐) 먹고 들어오는 엄마의 남편 탓에 혼자서 모든 걸 해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남자가 돈을 못 버는 건 아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이었으니 오히려 그 당시에는 엄마가 집에서 애 둘 키우며 살림만 하는 선택지가 거의 유일했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서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청소나 살림에 영 소질이 없었다. 나보다 소질이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 오히려 그 방면엔 아빠가 더 능숙해서 술에 취하지 않은 주말, 요리와 살림을 담당했다. 그나마 부모 노릇은 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껏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동생을 등에 업고 다니며 어린이집 원장 자격증을 땄다. 돈을 빌려서 건물 2층 월세를 구하고 볼풀장, 미끄럼틀, 책상, 의자, 동화책 등 인테리어에 투자했다. 선생님 2명, 주방 아줌마까지 고용해 고정지출 비용만 수백만 원에 달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돈 100만 원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도 벌벌 떤다. 안 팔리면 다 빚이 되고 짐이 되는 거라서 책더미에 깔려 죽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엄마는 참 대단도 하다. 그렇게 매일 아침, 애 둘을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출퇴근하며 자기만의 사업을 꾸려갔다.


그동안 엄마가 일을 계속 한 게 당연히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된 나는 이제 안다. 엄마는 꿈을 이루고 싶은 청춘이었을 뿐이다. 누구의 명령을 따르기보단 주체적으로 일하고 성취해야지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형이었다.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돈을 많이 벌어서 원하는 것을 팍팍 사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는 여전히 꿈을 꾼다. 언젠가 40평짜리 아파트도 사고 벤츠도 사고 땅도 산단다. 좋아하는 그림 그려 전시회도 하고 패션 디자이너로 옷도 만들겠단다. 환갑이 된 엄마는 꿈과는 상관없어 보이지만 다 연관이 있는 거라며 알뜰시장에 나가 옷을 판다. 그러면서 내가 회사 다니면서 책을 쓰고 유튜브도 하고 만화도 그리며 다채롭게 일을 벌이는 걸 보면 엄마는 말한다. 


“사위 월급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집이나 잘 가꿔. 쉬엄쉬엄 낮잠도 자고 산책하면서 쉬어. 여자는 그게 돈 버는 거라니까?”


시대를 역행하는 이 발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새로운 이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정작 80년대에도 그렇게 산 적 없으면서. 더욱이 내가 누굴 닮아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건데! 자기 보상이 철저한 것도 닮았다. 나는 1시간 일을 하면 2시간 동안 영화를 본다. 엄마는 봉고차를 운전해서 야간반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면 무조건 놀러 나갔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았으니 지칠 만도 한데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추억의 호프집, 투다리로 향했다. 어김없이 나와 동생도 함께였다. 


지금의 내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자주 친구들을 만났다. 엄마 친구들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애들은 애들끼리 알아서 놀게 하면 되니 편하기도 했겠다. 문방구 아줌마의 남매, 철물점 아줌마의 외동아들 그리고 나와 고다. 이렇게 다섯 키즈는 나름의 회식을 즐겼다. 어른들마저 우리 얘기를 듣고 미친 듯이 배를 부여잡고 웃을 정도였지만 이야기라고 해봐야 엄마, 아빠가 싸울 때 무슨 욕을 했는지 흉내를 내 거나 엄마의 거대 방귀 소리나 뿡뿡거리는 수준이었다.


언제는 애들끼리만 봉고차에 타고 있던 적이 있는데 가장 까불이였던 철물점집 아들이 기어를 내리는 바람에 차가 후진하며 슬금슬금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샛길 바로 옆은 낭떠러지였고 아래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줌마가 달려와 차 문을 연 채로 뭘 어떻게 했더니 간신히 샛길 가운데서 차가 멈췄다. 애들과 어른들은 그걸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목숨을 건사하고, 아동학대로 잡혀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인 아찔한 일이거늘, 그런 일로 하나같이 웃기만 했다는 게 당시 우리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여자 어른들은 만나기만 하면 즐거워했고 나는 그런 여자들을 보는 게 좋았다. 엄마는 집에서 잘 웃지 않았다. 아빠와 있을 때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겐 불행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웃음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정이 다 되어서 들어와도 아빠가 먼저 와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모님이 다정하게 대화하는 걸 본 기억보다 큰 소리로 싸우던 기억이 많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아빠랑 잘 지내는 것에 발끈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아빠에 대한 미움과 정으로 여전히 그를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한다. 


마흔 즈음에 엄마의 인생은 변했다. 예전처럼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만날 친구들 또한 사라졌다. 우정에도 헤어짐이라는 게 있다는 걸 엄마와 아줌마들을 보고 미리 배웠다. 엄마는 그들과 절교했다. 그때 내가 중학생이었는데 나는 왜 아줌마들을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캐물으며 엄마를 난처하게 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왜 엄마는 친구들과 싸울까’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친해서 당연히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되면 알게 된다. 나도 엄마처럼 그랬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조금 엇갈려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묻어두고 덮어두며 둥글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긴 하던데 엄마랑 나는 그게 안 되나 보다. 이것도 유전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소개 

1988년에 수원에서 태어난 후 2019년에 뉴욕으로 이사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일, 영상을 만드는 일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했지만 자세히 소개하기엔 어쩐지 너무 오래된 일 같아 생략한다. 퇴사 후에는 줄곧 에세이를 쓴다. 그렇다고 에세이스트 혹은 전업 작가라고 하기에는…… 

에세이 <솔직한 서른 살> 출간 후 홀로 172nd BOOKS 출판사를 운영한다. 

인스타그램 @hem_allow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