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인 성격과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엔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세상에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았고 실패와 거듭되는 거절의 순간들은 내게 적지 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조금씩 내 인생의 선택지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렇게 살다가는 하찮은 인생을 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결국 난 실패를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몰아넣기로 했다. 그렇게 홀홀 단신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아무도 없는 타국으로 단돈 200만 원을 들고 떠났다.
그곳에서의 5년은 삶 자체가 실패와 거부, 이방인으로서의 배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실패를 맞닥뜨려도 좌절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을 친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패의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다시 일어서서 부딪혀야만 했다. 그렇게 조금씩 실패를 온몸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순간들에 익숙해졌고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오기를 부리며 하루하루 버텨내었다.
스스로 온실 속의 화초라 칭하며 나 자신조차 나에게 믿음이 없던 때가 있었다.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고 아직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용기도 없던 그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나 혼자 해결해야 했던 타국에서의 시간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진짜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
미숙한 영어로 할 수 있는 건 한국식당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던 초기 영국 생활, 처음 들어 본 무거운 고기불판에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고 손을 들어 나를 부르는 영국 손님에게 같이 손을 들어 인사만 하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등짝을 맞았던 기억. 맥도널드에서 일을 할 때는 업무 시간이 끝나 학교에 가야 하는데 바쁘다며 보내주지 않는 인도인 점주 때문에 락커룸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서러움을 쏟아내며 친구 어깨에 기대어 펑펑 울었다. 돈을 아끼려 허름한 주택에 방을 하나 빌어 살던 시절, 이불 위에까지 침범한 생쥐 때문에 함께 방을 쓰던 언니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에 올라가 벌벌 떨었고 수중엔 다음 달 방값밖에 안 남았는데 아르바이트에서 잘려 생에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도 했다. 취업을 하겠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는 내가 네이티브가 아닌 걸 알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여러 번. 빈속에 감기약을 먹고 실신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간 건 이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무용담이 되었다.
그 덕에 이제 나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얻어낸 하나의 성취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 가치를 제대로 안다.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더 이상은 실패가 두렵지 않다. 외려 이제까지 얻어낸 작은 성취에 머무르며 안주할까 봐 그것이 두렵다.사람들이 '니 나이에' '애 엄마가'를 운운하며 내 인생의 바운더리를 결정하려고 할 때마다 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려 런던 한복판의 모든 상점을 휘젓고 다니던 날의 용기를 떠올린다.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이던 크리스마스 시즌, 절박한 심정으로 "Do you have any job vacancy?"를 외치던 그 시절의 나를 말이다.
내 인생의 바운더리는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쉼을 배우겠다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건 모순 같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패배감도 다음에 올 성취를 위한 자양분이될 것임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