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정 과장님 통화 가능해요?"
조심스럽게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3개월을 꾹 참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통화 버튼을 누른 참이다. 지난 5년 동안 나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동생이자 친구였던 사람과 3개월이 다 되도록 수다를 못 떠니 드디어 한계가 왔다. 다행히 1월에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보다는 훨씬 좋은 목소리다. 이제 새로운 팀에 적응도 했을 테고 어느 정도 일도 손에 익었을 시간이라 그 편안한 목소리에 내 마음도 놓인다.
오래간만에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니 눌러 왔던 수다가 봇물 터지듯 터진다.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쏟아 내고 나니 3개월 먹은 체증이 쑥 가라앉는다. 갑작스러운 내 전화에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던 그녀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라는 내 말에 텔레파시가 통했다며 금세 유쾌하게 웃는다.
5년 전 이직 후 첫 출근 날, 생애 처음으로 이직이란 걸 했던 내게 새로운 팀원들과의 만남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경력직이라곤 하지만 누구든 새로운 회사에선 신입의 마음일 수밖에 없는 법. 잔뜩 긴장해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내게 자신의 업무에 몰두해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나보다 직급은 낮아도 이 업무를 5년째 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감 있는 표정과 태도에서 이미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에게 낯설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겉으로는 잔뜩 가시를 세우고 방어벽을 친 것 같지만 속은 말랑하고 부드러운 따스함이 있을 것 같은 느낌. 낯선 환경에 놓이면 잔뜩 움츠려서 보호막을 치는 본능 같은 것 말이다.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솔직하고 친근하게 건넨 내 말 몇 마디에 그녀는 한껏 추켜올렸던 가드를 내리고 나에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첫날부터 단짝이 된 우리는 프로젝트가 진행된 5년 간 항상 붙어 다녔다.
그녀를 보면 이전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좌충우돌하며 감정 컨트롤이 안 되던 어린 연차의 나는 평소엔 온순하다가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잘하가도 한 번씩 덤벙거리기도 하고 그런 자신의 작은 실수를 보아 넘기지 못하고 자책하며 힘들어했다. 남에게 모진 말을 하면 자신이 더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도 나와 많이 닮아있었다.
오지랖 일지 모르지만 내가 겪어왔던 실수의 과정들을 그녀는 똑같이 밟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 덜 상처 받고 덜 아프면서 성장하길 바랐다. 옆에서 항상 들어주고 듣고 싶어 하는 얘기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답을 해 주었다. 너무 참견하면서 어줍지 않은 충고를 하고 싶진 않았다. 되돌아보면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나의 실수와 단점을 지적하는 얘기는 듣기 좋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런 진심 어린 말을 해 준 사람들이 진짜 날 걱정해 준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내가 그녀의 성장을 지켜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팀장이 되어 갈팡질팡하던 내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한 방향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날 믿고 따라와 주며 팀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줬다. 임원의 앵무새 같은 대변인이 아니라 팀원과 임원 간의 다리 역할을 하며 같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도록 독려해줬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성장에 기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모든 사람이 내 인맥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중 내 삶의 방향이 긍정적인 쪽으로 흐를 수 있도록 영향을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금맥이다. 그녀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사람.
그녀와의 인연이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수 있길, 그녀의 인생에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