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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검사,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by Rosary

인생을 좌우하는 건 타고난 유전자일까? 부단한 노력일까? 그래도 4050 세대까지는 노력의 가치와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2030 세대들은 타고난 유전자를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아진 것 같다. 살다 보니 유전자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실감해서 그냥 인간은 어떻게 타고나는지에 따라 인생이 정해진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졌다.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유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돈의 한도가 없다시피 한 굴지의 재벌가도 유전적 질병에 맞서기는 어려운 걸 보면 평범한 소시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얼마 전 10만 원 정도 하는 유전자 검사만 해도 암, 심장질환, 뇌혈관 질환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어, 할 만하다는 글을 보았다. 본인의 침을 우편으로 보내면 결과지를 수령하는 방법으로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매우 간단한 과정'에 신뢰가 생기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유전자 검사를 할 만한 병원을 찾아보고 문의를 했더니 일단 유전 클리닉에서 담당의에게 상담을 받아보라고 해서 예약을 하고 방문해서 오전 10시에 진료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차분한 인상의 담당의는 가족 구성원의 암과 주요 질병에 대해 물었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한 이야기들을 모두 메모하고, 가계도를 그리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조금 어려운 대목도 있었지만 대부분 알아듣기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근 시중에서 진행하는 유전자 검사로는 놓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고 단체 건강검진의 요식행위로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요 유전성 암에 대한 발병 가능성이 있는 35개 유전자에 대해 돌연변이 유무를 확인하여 암 발생을 예측하고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검사는 비용이 꽤 많이 발생하니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는 설명이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고 ‘아는 게 힘’일 수도 있지만 암 발병 가능성에 매몰되어 ‘모르는 게 약’이 나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더니 암 발병에 유전자 연관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면서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 젊은 나이에 암이 발병하거나 심장 돌연사를 하는 집안사람이 여럿 있는 경우 두드러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담당의가 쓰는 메모가 A4 한 장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진료실을 나와서 시간을 보니 10시 32분이었다. 알고 싶은 모든 걸 물어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의 궁금증은 풀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검사 시간이 아닌데, 순수하게 의사와 30분이 넘는 대화를 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심지어 조그마한 병원도 아니고, 길고 긴 대기시간을 거치고도 2~3분 만나기도 어려운 대형종합병원 의사와 이렇게 오랫동안 마주 앉아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유전 클리닉이라는 특성상 예약 환자들이 밀려드는 외래가 아니어서 가능한 상황이겠지만, 자신의 전반적인 건강에 걱정이 되는 사람이라면 시도해 볼 만한 진료과 상담이 아닌가 싶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유튜브에 온갖 건강정보가 쏟아지면서 사람 잡는 선무당에 현혹되기 쉬운데, 수십만 원 수백만 원에 이르는 유전자 검사를 받지 않더라도 유전 정보에 기반한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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