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당하는 사람들도 속사정이 있겠지만…
한해 동안 읽은 책들을 정리하는데 『배드 블러드』가 눈에 띈다.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사업가 엘리자베스 홈즈가 창업한 테라노스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책은 4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도 만만치 않지만 학력고사 수학시험 보다가 잠들었을 정도로 평생 이공계 분야에 담을 쌓고 지낸 내가 읽기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탐사보도 전문 칼럼니스트 존 캐리루가 엘리자베스 홈즈와 테라노스의 사기행각을 취재해서 폭로한 내용은 엘리자베스 홈즈의 무모함과 대담함도 기막히지만, 손녀뻘 여성에게 홀랑 넘어가버린 조지 슐츠, 제임스 매티스, 헨리 키신저 등 미국 정계의 거물들이 뭐가 씌는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다. 젊은 여성에게 속아 넘어간 저명인사들은 오랫동안 쌓아온 명성에 먹칠을 제대로 했다.
최근 국내 연예계에서도 수십 년간 믿었던 가족, 십수 년간 신뢰했던 소속사 대표에게 철저하게 뒤통수 맞은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대중들은 사기 친 사람들도 나쁘지만 피해 당사자들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난 기사로 알려진 내용은 대중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분명 인생 절반을 쌓아온 친밀함과 신뢰가 바탕이 된 구구절절한 사연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홈즈의 사기 대장정이 워낙 어마어마한 데다가 『배드 블러드』 도 휘몰아치듯 잘 쓴 책이라 영화화는 시간문제구나 싶었는데 엘리자베스 홈즈 역에 제니퍼 로렌스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드라마 <드롭아웃>이 먼저 공개되었다.
엘리자베스 홈즈의 몰락을 보면서 2004년 황우석 박사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황우석 박사는 50대의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확고부동한 사회적 위치가 있는 인물이어서 연구 성과에 대해 의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엘리자베스 홈즈는 의대를 중퇴한 이력이 있을 뿐 뚜렷한 성과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회 저명인사들이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열광했다는 게 더 놀랍다. 저널리스트 존 케리루가 의문을 품기 전까지 그녀의 광폭 행보에 강하게 제동을 건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가끔 물건을 살 때 포장에 혹해서 샀다가 내용물에 실망한 적이 있긴 해도 사람까지 번지르르하게 꾸민 허울에 속아 본색을 놓쳐서야 될 성싶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이런 경험이 적지 않다. 명문대학 출신이어서, 외모가 출중해서, 언변이 뛰어나서, 인맥이 화려해서 그 사람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가 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였음을 깨닫고 실망하기도 한다.
포장에 잠시 흔들릴 수는 있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까지만 하자. 정신을 차리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을 해야 속지 않을 수 있다. 속는 순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게 사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