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이면 떠오르는 불효의 기억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는 그 사랑을 느끼는 순간들이 아주 많았다. 아버지는 193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와 동년배들은 일찌감치 가정을 이루고 보통 4남매 이상 두고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살았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들과 많이 달랐다. 결혼은 30대 중반에 하셨고, 자식 욕심이 없어 남매만 두었다. 엔지니어였지만 돈버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정적이었다.
남자로서의 야망을 불사르지도 않았고, 여자 문제로 엄마 속을 썩인 적이 우리가 알기로는 한 번도 없었다. 늘 일을 마치면 곧장 귀가하셨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30년대 사람이라기보다는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7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좋게 말하면 무사태평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부지였다. 아빠를 아버지로 부른 시간도 80대에 접어들어서였던 것 같다. 늘 친구 같은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고, 예민하고,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돈을 잘 벌지 못해서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지만, 중년에 접어들어서 점점 못마땅하게 생각한 게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애정을 베푸는데 인색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는 어머니와 왜 결혼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가 되어서야 두 분의 상관관계가 명확해졌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훨씬 많이 좋아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면 두 분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텐데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몰랐다는 건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모님의 애정전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부싸움도 꽤 하셨지만 우리 남매가 철들고 나서는 싸우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고, 부모님 사이가 가정의 평화가 깨질 정도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사이가 좋으시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었다.
그런데 연로하긴 하셨어도 정정하셨던 부모님이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고, 금방 돌아가셨기 때문에 간병과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실 간병이라고 할 정도로 투병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서 부모님이 사라지셨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평소 아버지는 건강 프로그램에서 좋다는 음식이 있다면 알아서 챙겨 드시고, 조금만 몸이 좋지 않아도 스스로 병원에 가셔서 아버지의 건강은 걱정이 없었고, 아버지에 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엄마에게 관심이 기울어졌다. 아버지는 늘 변비로 고생하셨는데 변비에 좋다는 것들은 수년 동안 이것저것 사드셨고, 병원도 자주 다니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변비는 예민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기에 해결되지 못했다.
그 해 9월 중순이니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큰 병에 걸린 걸 모르던 시기에 외출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셨다. “들어올 때 키위 좀 사다 줄래. 키위가 변비에 좋다고 해서 좀 먹어보려고.”
아버지의 부탁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가엾고 안쓰러운데 당시에는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던 시기여서 그 모습조차 얄미웠다. '나는 엄마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데 아버지는 태평하게 키위를 사다 달라고 하시네.' 귀갓길에 키위를 사가지고 갔더니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주에 아버지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고, 아픈 어머니보다 일년이나 앞서 내 곁을 떠나셨다.
귀하고 값비싼 무언가를 부탁한 것도 아니고, 고작 키위를 사다 달라고 하면서 눈치를 살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사무치게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돌아가실 줄도 모르고 아버지에게 쌀쌀맞게 대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오래오래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금세 내 손을 놓고 떠나실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