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친척이 함께 했던 명절의 추억
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동년배들은 명절 귀성길 관련 웃지 못할 추억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서울이어서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명절을 지내고 학교에 온 친구들의 무용담에 동참하지 못하고, “정말? 정말?” 이런 추임새를 넣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10시간이 걸렸다느니, 부산까지 15시간이 걸렸다느니 하는 지금은 믿기 힘든 귀성길 에피소드는 당시만 해도 흔한 레퍼토리였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을 하는 아빠들도 짜증이 나고,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는 엄마들도 신경이 날카로운데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씩 제자리에 서다 가다를 반복하다 보면 차 안에서 부부싸움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빠엄마는 싸우고, 어린아이들은 울고불고,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을 텐데,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해진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참 정겨웠던 시절이다.
지금도 명절 연휴 뉴스 시작이 귀성길 관련 소식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80년대와 90년대의 귀성길 전쟁과 비교하면 평화롭기 그지없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귀성길에 나서는 570만 명 가운데 기차표와 비행기표를 미리 예매한 150만 명으로 나머지 420만 명은 70만 대의 승용차를 이용해서 고속도로와 국도에서 뒤엉킬 예정이라는 무시무시한 리포트를 듣는 것_1990년 9월 28일 뉴스데스크_만으로도 아찔하다
왕복 20시간을 차에서 보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면 다음 명절에는 반드시 기차로 이동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지만, 한정된 수량 탓에 승차권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미리 승차권을 예매하지 못한 시민들은 입석이라도 구해서 고향에 가기 위해 늦은 밤까지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면서 표를 구하기도 했다. 그나마 입석이라도 구해서 기차를 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끝내 표를 구하지 못하면 승용차를 끌고 고속도로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명절에 다들 고향을 가는 바람에 서울은 텅 비고, 서울에서 이동하는 우리 가족은 언제나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친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외가는 회현동이었지만 택시를 타면 길이 뻥 뚫려 있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하곤 했다. 일가친척들이 대부분 가까이 살았으므로 모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차례 지낸 후 아점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이른 오후에 귀가하니 일단 같이 보내는 시간이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사소한 감정다툼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귀향해서 가족들이 모이면 꼭 싸우는 게 익숙한 명절 풍경이 된 것도 오랜 시간 정체된 도로에서 시달리면 지치고 예민해진 상태인 데다가 벼르고 별러 열몇 시간 걸려서 도착한 고향집이라 적어도 하룻밤은 자고 오게 되니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면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곱지 않게 받아치다가 싸움이 커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엔 명절 귀성인파보다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훨씬 더 많아진 분위기라 예전처럼 도로정체가 심하지는 않다. 대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몰리는 공항이 북새통이 되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어린 자녀들을 차에 태우고 하루 종일 운전해서 고향으로 향하던 부부들은 노년을 맞이했을 텐데 그들의 명절은 혹시나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도 된다.
모처럼 맞이한 추석 연휴를 자유롭게 쉬거나 여행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보냈을 때가 행복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