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대호(白磁大壺)에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우리나라 도자기의 대명사라고 하면 고려청자(高麗靑瓷)와 조선백자(朝鮮白瓷)에, 하나 더 보태자면 분청사기(粉靑沙器) 정도일 것이다. 고려청자가 워낙 유려하고, 화려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백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 백자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이 재평가되면서 전시와 상품화가 활발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 담겨 검소하고 깨끗한 백자가 대세가 되었는데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은 조선백자의 전성기였다. 고결하게 살고 싶어 하는 선비 정신을 표현한 백자는 가로 세로의 비율이 1대 1 정도인데 높이가 40~50cm 이상인 것은 특별히 큰 항아리 또는 대호(大壺)라고 불렀다. 이렇게 크기가 큰 항아리의 경우 흙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만든 다음 이 둘을 서로 붙여 완성하여 접합 부위가 불균형하고 뒤틀린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당시 장인들은 이 비뚤어진 형태를 균형을 맞춰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청자와 백자를 매끈하게 잘 만들었던 장인들이 이를 다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완벽하고 인위적인 모습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중국이나 일본의 자기와 구분되는 달항아리만의 독특한 매력이 되었던 것이다.
‘백자대호’라고 칭하던 도자기가 ‘달항아리’라는 서민적이고 정겨운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면서 오히려 위상이 올라간 것은 흥미롭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백자대호’에게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달아준 분은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화가 김환기(1913~1974)와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 역시 ‘달항아리’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지만 학계에서는 위엄있고 거창한 명칭을 포기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의 개관 첫 전시 제목을 ‘백자 달항아리전’으로 정하면서 ‘백자대호’는 ‘달항아리’로 대중화되었다. ‘달항아리’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07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높이 48.2cm 달항아리가 127만 2천 달러(한화 약 12억 원)에 낙찰되어 모두를 놀라게 한 바 있는데 올해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인 소장자가 내놓은 높이 45.1cm 달항아리는 무려 456만 달러(한화 약 60억 원)에 낙찰되어 그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가늠케 한다.
한가위를 밝히는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처럼 우리 조상들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달항아리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서민적이고 친숙한 달항아리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으로 귀하신 몸이 되어 거리감이 느껴지게 된 건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참고 『한국의 미를 만나는 법』 메인 이미지 보물 702호 달항아리_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