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에 젖은 눈동자, 양조위
따뜻한 눈빛이 건네는 위로
양조위라는 배우를 처음 본 건 영화 <중경삼림. 1995>이었다. 1990년대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왕가위 감독은 홍콩을 뛰어넘어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스타 감독이었다. 필름의 프레임에서 중간중간 프레임들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동일한 프레임을 채워 넣는 스텝프린팅 기법과 카메라를 고정시키지 않고 들고 찍으면서 날것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핸드헬드는 왕가위 감독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이러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히트한 영화가 바로 <중경삼림>이다. 이 영화에는 연인과 헤어진 후 실연의 아픔을 견디고 있는 경찰 223(금성무 분)이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마약밀매상(임청하 분),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애써 외면하는 경찰 663(양조위 분), 그를 짝사랑하는 식당 점원 페이(왕페이 분)가 등장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중경삼림. 1995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중2병 말기와도 같은 오글거리는 감성의 대사가 이어지지만 당시에는 서사보다 감성을 담은 시적인 내레이션과 독백이 X세대들을 열광케 했다. 기성세대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중경삼림>에서 4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가 양조위가 연기한 경찰 663이었다.
양조위는 80년대 무협, 코미디 영화에서 얼굴을 알린 배우였지만 전형적인 홍콩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의 작품을 본 게 없어 <중경삼림>에서 처음 보았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전형적인 중국인 얼굴처럼 느껴졌다. 왕페이와 안 어울린다는 생각뿐 내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시클로. 1996양조위의 매력을 느낀 영화는 홍콩영화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베트남 영화 <시클로. 1996>였다. 양조위는 사랑하는 여자의 매춘을 알선한 후 괴로워하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갱단 일원으로 등장하는데 묘하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여서 당황스러웠다. 악당인데 한없이 가여운 얼굴을 한 양조위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해피투게더. 1997>, <화양연화. 2000>, <색, 계. 2007>의 양조위도 좋았지만 <무간도. 2003>에서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 진영인을 맡아 반대로 경찰에 잠입한 범죄 조직원 유건명 역의 유덕화와 멋진 앙상블을 펼치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무간도. 2003그때까지만 해도 스크린 속 그의 외모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후 한국에 온 양조위 실물영접을 두세 번 한 후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조각 같은 미남도 아닐 뿐 아니라 그리 체격이 큰 편도 아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따뜻하지만 강렬한 에너지는 상대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했다.
대만의 거장 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비정성시. 1989>에 양조위를 캐스팅하고 싶었지만 광둥어만 할 줄 알고 대만어를 할 줄 몰라서 난감해하다가 캐릭터를 아예 농인으로 바꿀 만큼 절실했던 마음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빚어놓은 것처럼 잘생긴 배우는 많지만 양조위 같은 눈동자를 가진 배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양조위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지만 그의 형형한 눈빛만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