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
지독히도 나쁜 꿈을 꾸다가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문득 It’s only paper moon이라는 노래가 떠올라서 유튜브에서 찾아 여러 버전을 보다가 영화 <페이퍼 문. 1973>OST를 보게 되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어딘가 낯익어 자세히 보니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라이언 오닐(1941~2023)과 그의 딸 테이텀 오닐(1963~) 이었다. 라이언 오닐은 <러브 스토리. 1970>로 유명한 배우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인기는 대단했다. 금수저 하버드 로스쿨생과 가난한 래드클리프 음대생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이후에도 멜로 드라마의 전형처럼 우려낸 사골국물 같은 설정이지만 당시에는 여성 관객을 사로잡은 강력한 서사의 시작이었다.
부잣집 아들의 전형처럼 부티나게 잘생긴 라이언 오닐의 이후 행보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어린 딸 테이텀 오닐이 최연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둔 <페이퍼 문>의 원래 캐스팅은 폴 뉴먼과 그의 딸이었으나 제작자가 변경되면서 라이언 오닐 부녀로 바뀌었다고 한다. 라이언 오닐은 각종 사건사고로 간혹 근황을 알렸을 뿐 <러브 스토리>의 올리버는 잊혀지고 말았다. 말년에는 파라 포셋을 향한 찐사랑으로 로맨틱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라이언 오닐은 아들 그리핀에게 총을 쏜 적도 있고, 딸 테이텀 오닐이 학대를 폭로했을 정도로 빵점짜리 아빠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후광으로 테이텀 오닐은 아카데미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었으니 아버지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다.
1991년 그래미상에서 또다른 부녀의 무대가 이목을 사로잡았다. 나탈리 콜(1950~2015)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1965년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 냇킹 콜(1919~1965)의 생전 영상을 합쳐서 자연스럽게 함께 노래하는 감동적인 모습은 당시 TV로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찡했던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과 약물복용으로 추락하던 나탈리 콜은 1991년 아버지 냇킹 콜이 생전에 녹음했던 “Unforgettable”에 자신의 노래를 입혀 듀엣으로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으며 그해 그래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팝음악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Natalie Cole & Nat King Cole "Unforgettable" 1991 (audio remastered) (youtube.com)
나탈리 콜이 훌륭한 보컬리스트인 건 분명하지만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냇킹 콜은 수렁에 빠져있던 딸에게 기적 같은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 실력 자체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력한 유전자에 의해 생긴 재능이지만, 비즈니스적으로도 그녀에게 엄청난 도움을 준 것이다. 1996년에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소환한 ‘When I fall in Love”로 다시 한번 그래미상을 수상하면서 아버지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어린 나탈리 콜이 노래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냇킹 콜의 사진 한 컷은 진한 여운으로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주었을까. 부를 일구지 못한 아버지는 경제적인 유산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일을 하고,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전자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도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편이지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지적 호기심, 순발력, 감각 덕분이었다. 세상을 호령할 만한 대단한 재능은 아니지만 이 모진 세상에서 직장을 얻고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다. 특히 자식이 중년에 이르도록 마르지 않는 사랑을 퍼주고 또 퍼주신 아버지를 떠올리면 언제나 눈물이 차오를만큼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