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를 존중해주길.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요즘 쇼핑을 할 때 마주하는 건 계산원보다 키오스크일 때가 더 많다. 마트에서도, 커피를 살 때도, 햄버거나 치킨을 주문할 때도, 심지어 문구점에서도 키오스크가 떡 버티고 서 있다. 젊은 손님들에게 키오스크는 편리하고 익숙하지만 키오스크 앞에서 얼어붙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을 종종 본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오른다.
영국을 대표하는 좌파 감독으로 알려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랜드 앤 프리덤. 1996>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켄 로치 감독 영화 중에서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건 미국 이민자들의 노동환경을 비판한 <빵과 장미. 2000>, 아일랜드 무장봉기로 엇갈린 형제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06>이었다. 바보 같은 동네 친구들의 로드 코미디 <앤젤스 셰어. 2012>를 보면서 거장 감독이 건네는 농담을 즐겁게 보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는 형식에 급급한 영국 복지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해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세계 어느 도시에 거주하고 있을지라도 소외계층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는 사실적인 묘사와 강렬한 메시지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갔지만 평생 목수일을 했던 다니엘에게 컴퓨터로 양식을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젊은이들에게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어도 컴퓨터를 접하지 않고 평생 살아왔던 노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을 바라보면서 좌절할 뿐인데도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공무원들은 민원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당장 끼니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받으려면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인지 입증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서 혜택을 받는 악당들 때문에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까다로운 절차가 늘어나는 현실은 안타깝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다니엘,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는 형식과 절차에 급급한 제도의 허점 때문에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생존에 위협을 받는 모습은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이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던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으로 인해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나 2019년 성북구에서도, 2022년 수원에서도 비슷한 죽음은 이어지고 있다.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고독하게 외친다. 특별대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존중해주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