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나 마주할 용기가 겨우 날 듯한 깊은 일, 상황, 얼굴들이 있다. 정말 고개 들어 눈 직면하고 나면 그 뒤의 일이 너무 두려워 평생을 걸고 모른 척 외면하는 아픔의 기억들이 있다.
때때로 고통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근원에서 온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갈수록 애써 외면하고 있음에도 그 얼굴들을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는 역설에 빠진다.
가정, 연인, 모임 등 사람 관계에서의 깨어짐일 수도 있다. 혹은 욕심, 게으름, 분노, 우울 등 스스로에 대한 무너짐이 나의 아픈 자리일 수도 있고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나 외부의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자리가 너무도 많다. 이런 것들은 왜 주어졌으며 어찌해야 할까.
나는 특히 사람 관계에서 유독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많다. 눈 감고 있노라면 한 명, 한 명 얼굴과 이름들이 모두 기억난다. 그들은 나에게 미움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다. 기억으로 깊게 들어간다면 쓰디쓴 아픔일 수 있으나 거리가 멀어진 탓일까 그리 밉지가 않다.
그러나 죽기 전 즈음에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소상히 듣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때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으며, 왜 그렇게 했는지, 그러면 나는 어찌했어야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러나 어쩌면 당사자들은 다 잊었을지 모른다. 그저 망각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조금은 허무하다. 나를 그리도 아프게 했던, 내가 그리도 사랑했던 당신들께서 그저 기억 안 난다 말할까 봐, 혹은 그 이유가 ‘그냥’일까봐 때론 두렵다.
귀책에 나에게 있다 생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또 곱씹다 보면 이런 점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이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만 나는 매우 우울했으나 매우 밝았다. 좀 더 간단히 멘탈이 약했다. 게다가 늘 과하게 눈치를 보았고 능력에 벗어나게 자꾸 책임을 지나치게 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늘 행동이 틀렸다.
생각의 결론이 결국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동일해져가는 일은 슬프다. 참 슬프다.
결국 내 문제였구나, 나는 이때 왜 이렇게 했을까.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구나, 지켜내지 못했구나. 늘 내어주는 것이 익숙한 탓에 기쁨과 행복마저 모두 남에게 줘버리는구나. 주저앉고 울지도 못하는 일이 내겐 익숙했다. 시간이 지나버린 깨달음과 해결책의 발견은 오히려 더욱 깊은 쓸쓸함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질타하는 일은 그만두려 한다. 과거의 초등 교사처럼 매를 들며 잘못했다, 잘못했다 거듭 얘기하며 행태를 꾸짖는 일은 이제는 질려 그만하려 한다. 나의 내면을 돌아보며 생각을 키우며 사고의 결과로 회복하려 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모든 일에 나의 귀책이 있는 일은. 그러기에 동시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일들이 상호작용 끝의 결과인 것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힘들 땐 힘들어하는 게, 우울할 땐 슬퍼하는 게, 분할 땐 화도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세상의 이런 자연스러운 일들을 받아들이고서 각각의 감정들을 잘 해소하고 때때의 어려움들을 결국 헤쳐나가는 거다.
결국 중요한 일에만 마음 쏟으리라. 결국 중요치 않은 시선들과 생각들에 마음 쓰고 또 뺏기지 않고서 오롯이 나아가리라. 내 키가 장성하여지면 어깨에 와 길을 막던 가시들도 결국 발바닥 창에 깔리는 잔털이 되리라.
죽음 직전에나 겨우 마주할 수 있을 듯한 그 얼굴들을 오히려 늘 직면하며 함께 행복으로 데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