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붙어만 계셔 주세요.
"형. 진짜루 서른 살이 되면 오줌 누다 신발에 막 흘려? 아우..드러워서 으뜨카냐..조심해서 잘 털어야겠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한 살 어리다고 신나게 놀려먹던 부메랑이 그대로 내 정수리에 꽂힐 줄은.
20대 초반부터 머머리 증세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맨날 놀려 먹던 형들 몇몇이 그랬는데, 그중 한 명은 패셔너블한 노란 썽구리에 턱수염을 기르고 항상 비니를 쓰고 다녔습니다. 뭐랄까. 보급형 레옹 같은 모습이었죠. 하지만 우린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는 걸.
카나다로 이민을 간 아는 동생은 남자가 봐도 참 인물이 훤칠합니다. 복싱을 해서 몸도 탄탄하고, 옷도 잘 입고, 성격도 서글서글하니 좋지요. 그런데 이 친구도 얼마 전에 조용히 들어와서는 머리를 심고 다시 나갔습니다. 모내기하듯 뒷머리를 쑉쑉 뽑아서 앞으로 옮겼답니다. 카나다는 그런 게 몹시 비싸기도 하고, 또 한쿡처럼 잘하는 데가 없다는군요.
좀 까불거리는 녀자 후배들은 빗자루 터럭 같은 머리와, 오전에 면도해도 오후면 거뭇해지는 수염 때문에 “털붕어”나 “털붕” 같은 천인공노할 별명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서너 마리씩 떼 지어 몰려와서 “털부우우웅!” 을 외치고, 자기들끼리 우끼다고 깔깔거리다 도망가면 대체 저것들을 어떻게 응징해야 하나.. 아주 곤난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마흔이 되기 전까지 제 인생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하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감기, 두통, 탈모 같은 것들이죠. 특히 지나치게 숱이 많고, 머리카락도 드센 데다, 잡초마냥 잘 자라서, 크라는 키는 안 크고 몹쓸 털만 잘 자란다며 투덜거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나 불경하고 오만방자한 짓이었는지, 모발님 뵐 때마다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마흔 중반부터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더니, 머리 감을 때마다 머리가 100가닥씩 빠집니다. 회사 앞에 피부과에 갔더니만 약을 먹으면 느려지긴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방법이 없다네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탈모가 없었는데요..하고 물었더니 격세 유전일 수도 있고, 저부터 시작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해서 양쪽 할아버지를 다 확인해 보고 싶은데, 친할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때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때 돌아가셔서.. 뭐.. 네.
막막한 상담을 이어가던 와중에, 이 지나치게 솔직한 의사 선생님이 가슴에 대못을 박습니다. 공구리 못 좀 쳐보신 솜씨예요.
"딱 부러지는 방법 같은 건 없어요. 브루스 윌리스가 돈이 없어서 머머리겠어요?“
”야!! 없을 수도 있지!! 접때 피자집 하다가 망했잖아!!”
마음속으로는 당당하게 외쳤지만, 입에서는
“아.. 브루스 윌리스.. 네.. 그러네요.. “
라고 모기소리만 하게 옹알거려 봅니다...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면 평소 성격이 나옵니다.
방법이 없다고? 그럼 밀지 뭐..
마나님께 상담.
"저기. 나 있잖아. 방법이 없다는데. 그냥 박박 밀까 봐."
마나님이 갑자기 급정색을 하고 각을 잡으시더니만, 진지하고, 치이인-절하게 따복따복 설명을 해 주십니다.
머리를 박박 미는 건 소위 "빈"류 들 같은 생물학적 소수들이나 하는 거다. 물론 너도 생물학적인 소수이긴 하다만, 방향성이 뚜렷하게 다르지 않니. 빈류들이 박박 밀면 비장한 전당포 아저씨지만, 니가 박박 밀면 범죄도시의 장이수가 된다. 게다가 너의 인상과 체형은 누가 봐도 제3 금융업이나, 인가되지 않은 향정신성 의약품 유통에 종사하시는 분들 체형이다. 너 범죄도시 봤지? 거기 배경이 구디 옆 동네인 거 알지? 너 박박 밀고 백팩 메고 돌아다니면 아무도 그 백팩에 노트북 있다고 생각 안한다. 아서라.
그러나 마나님도 걱정이 되긴 하시나 봅니다.
"파마할래?"
"시러."
"콩자반 사주까?"
"시러."
"죽을래?"
"아니요."
포도송이 작가님이 모발님께 반성문을 쓰면 효험을 볼 수 있다고 하셔서, 부랴부랴 급하게 써 봅니다.
옛날에는 나쁜 짓하면 후손들이 안 풀렸지만, 요즘엔 당대에 되돌려 받는다더니.. 그때 그렇게 놀려 먹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잘못했습니다. 모발님. 앞으로는 소중하게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비누 대신 샴푸로 감고, 린스에 트리트먼트까지 꼬박꼬박 쳐발쳐발 하겠나이다. 하얀색도 좋으니 붙어만 계셔 주세요.
FIN. 감수성 오랑캐, 궁예, 원뻔맨 모두 쌉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