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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Sep 14. 2024

위험한 일러스트

그 위험한 걸 제가 해냅니다.

"산업 형태의 변화"를 주제로 한 간단한 일러스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큰 구도는 다 잡혀서 왔고, 일러스트만 얹으면 되는 간단한 작업. 다만 증기 기관에서 의견이 살짝 나뉩니다. 최초 발명자인 뉴커먼의 증기 기관으로 할지, 잘 알려진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으로 할지 제법 긴 이야기가 오갑니다. 저는 아무래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와트 쪽에 더 마음이 갑니다.

증기 기관은 제임스 와트지..

몇 가지 자잘한 수정을 거친 뒤에, "산업형태의 변화"는 최종 컨펌이 통과되었습니다.




다음 일러스트는 인간과 AI의 만남. 천지 창조를 모티브로 인간과 로봇이 송구락을 맞대고 있는 일러스트를 얹고, 뒤에는 다빈치가 그린 황금비율 인간을 넣기로 했습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있으라..

역시 자잘한 수정들이 좀 있었지만, 이것도 큰 문제없이 진행돼서 O.K.




“고용 형태의 변화"는 좀..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70년대의 노동 시장과, 80년대 정규직-비정규직의 갈등을 어느 수준으로 표현할지가 좀 민감합니다. 30년 호황의 뒷면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그늘이 있었잖아요. 넣자니 여러 사람 불려 다닐 것 같고, 빼자니 그건 량심이가 좀..

우리 현대사는 결코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70년대에는 미싱을 하나 넣고, 깃발이나 피켓 류는 빼고 조끼와 머리띠 선에서 소프트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교과서 일은 편집자의 마음고생이 유난히 심한 것 같습니다. 저자 눈치 보랴, 나랏님 눈치 보랴, 사장님 눈치 보랴, 디자이너 눈치 보랴.. 어찌나 옆구리 찌르는 놈들이 많은지 보고 있는 저까지 사리가 나올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잘 끝났으니 다행입니다.



끗!..



몇 달 뒤, 편집자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작가니이이이임~!”


마감뒤에 날아온 경쾌한 하이톤의 목소리.


‘싸늘하다. 끝은 개뿔.

고니가 아귀를 만났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평소에 친절했던 편집자님은

오늘은 아주 치이이-인절 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니임~! 저 수정이 좀 있는데요. “

"네.. 근데.. 왜 때문에.."

"저 VR 바가지 손 모양 있잖아요. 다른 모양으로 바꿔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근데.. 왜 때문에.."

"저 손모양이.. 요즘.. 좀 그래요."


아.. 얼마 전에 난리 났다는 그놈의 손 모양.. 저놈의 이슈는 도무지 사라지질 않는구나. 교과서니까 저런 데서 걸리면 여러 사람 두루두루 피곤해질 겁니다. 이건 얄짤없이 다시 작업해야겠네요. 망할 놈의 새끼들. 하필 손모양을 골라도 젤로 흔하게 쓰는 걸 골라서, 저 놈의 손모양 때문에 그림에서 당최 뭘 잡을 수가 없습니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신난 VR 바가지의 손은 오해의 소지가 아예 없도록 여고생 V로 바뀌었습니다. 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루 여고생 V로 바뀌었어요.




"저.. 천지창조도.."

"네.. 근데.. 왜 때문에.."

"그것도 손 모양을 좀 고쳐 주실 수 있을까요?"

미켈란젤로 이 양반 진짜...알만한 사람이….

네.. 교과서 작업은… 저런 데서 걸리면 여러 사람 두루두루.. 젠장. 이것도. 얄짤없이 다시 해야겠네요. 아.. 미켈란젤로 진짜.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오해사지 않도록 엄지를 확 구부려 주세요..

넨넨. 오해 사면 안 되죠. 넨넨.. 어차피 쌍 삿대질이 컨셉이니까 뭐..




"저.. 작가니임. 그리고 있잖아요.. “

"네.. 근데.. 왜 때문에.."

"고용형태의 변화 말인데요.. “

"네.. 근데.. 왜 때문에.."

"남녀 성비를 1:1로 맞춰 주시고.. 암탉은 빼 주세요.."

"네.. 근데.. 왜 때문에.."

“암탉은.. 그냥 부탁드릴게요. 빼 주세요. 꼬기요..“


아.. 남녀 성비. 이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암탉은.. 젠장. 오골계나 댕댕이를 그릴 걸.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농촌을 표현한답시고 감히 암탉을 그리다니. 출판사 높으신 분이 암탉을 무서워하시거나, 요즘에는 암탉 그리면 안 되나 봅니다. 그럴 수 있죠. 어릴 때 암탉한테 쪼였다거나, 부모님의 원수가 닭띠라거나.. 뭔가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죠. 세상에 농부 옆에 암탉이 이르케 위험합니다..

대체 뭣이 중한디?

농부의 아내 추가, 정규직도 여자로 변경, 프로그래머도 여자로 변경. 그리고..


이 놈의 암탉은…

닭도리탕을 해 먹든, 치킨을 해 먹든 해야지.. 젠장.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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