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언제 지어진지도 알 만한 사람도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며 사라질 무렵 얼추 잡아도 99칸은 넉넉했던 기와집에 면사무소가 지어지고 나서 남은 건물들을 3가족이 나눠서 샀어. 소슬 대문이 있던 본채와 안채는 문 가네와 손가네가 차지했고, 달분(月現)재에 살던 강 씨네 어른, 훗날 나한테 제일 오래 머물던 이집 손자의 할아버지가 읍내로 나오며 작은 재집을 소유하게 되었어. 작은 재집은 안채에 저 뒤편에 있었는데 터가 제일 넓고 애들도 일꾼도 많았지만 알뜰한 어른은 모른 척 하고 계셨지. 마침 타지에서 들어온 최대목이 집 지을 일이 없어 역 앞에서 술로 한량 거릴 때 어른을 만났지.
“집을 좀 지어야 할 낀데~”
“어른, 요즘 새마을 운동 때문에 다들 반양옥이다, 스레트 지붕이다 이런 것만 지어 싸서요. 품을 헐어줘도 더 깍아 대고요. 면사무소 일은 뽀찌 주기도 버겁습니다. 장마만 끝나믄 영주나 안동 근처로 함 가볼라꼬요”
“가기 전에 우리 집에 사랑채나 하나 짓고 가게. 짓고 나믄 가을 걷이 끝나서 다들 넉넉한 살림에 집 수선도 제법 할끼고”
그렇게 내가 지어 졌어. 아궁이 딸린 방 한 칸, 소마굿간에 곳간까지 해서 제법 큰 일이였고 어른이 작은 재집 안채보다 잘나기는 그래도 쉬이 보이기는 싫다고 하는 바람에 기와도 두 겹을 깔고 목재도 청송서 금강송을 실어왔어. 그 덕에 최대목은 신작로 길 건너 작업장이 붙은 작은 집을 장만하고는 어른을 뵐 때 마다 탁배기를 받쳐 들고 ‘어른 덕분입니다.’ 라며 그을린 눈주름 선하게 웃곤 했지.
정작 이 집 자식들은 다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는 통에 나한테서 자는 일이 매우 드물었지. 일꾼들도 아래채에서 주로 머물렀고 땅이 넓어져도 경운기다 농약이다 하는 것들 때문에 사람 씀이 줄었고. 호랑이띠가 많은 집이라서 소마다 이래 저래 도망가고 죽고 해서 소마구간도 불 때는 일 말고는 쓸 일이 없었고.
6남매나 되는 자식들이 오면 몇 일 머물다 가는 갔지. 그러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이 집 큰 손자가 나를 떡하니 차지한건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야. 통통한 놈이 안채보다 높은 마루를 오를 려고 가슴팍을 붙이고 버둥 거리던게 어제 같은데 말이야.
아침에 나가 밤 늦어서야 들어오고 공부만 했으니 별 탈 없겠거니 했는데 사춘기를 겪더니 얘가 바뀌더라고. 고2쯤 시작할 때부터 어디서 술을 배워 와서는 간혹 친구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는 통에 걱정이 좀 되기 시작했어. 안채 대청마루에는 요런 저런 문양이 새겨진 유리창을 앙다문 단단한 문틀이 잘 막고 있어서 얘가 뭘 하는지 애비 애미는 들리지도 않았거든. 또 농사일에 내어 가려고 쌓아둔 술 때문에 애들 주머니 걱정도 없이 모이기도 했고.
그러다 대학교 갈 때쯤엔 안채에서 큰소리가 제법 나더니 웅크리곤 꼬박 하루를 자더라고. 그러곤 대구 집으로 학교를 간다고 떠나고 나선 자판기 동전 넣듯 짧게 하루씩 자고 갔어. 그리고 이듬해 설날이 지나고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윷놀이를 하던 날 곰보네 슈퍼 가듯 나가서는 석 달이 넘어서야 군복을 입고 돌아와서는 놀랬던 기억이 나네. 까맣고 깡말라서는 어제 나간 듯 들어 와서는 앉아 보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고 부랴부랴 나가서 섭섭은 했었지. 내 일 아니라고 제대는 또 빨리해서는 좀 같이 있나 했더니 또 안채에서 큰소리가 나더니 일주일 만에 보이지 않더라고. 그 사이 사이에도 얘가 좋아한다고 애미는 술을 삭히고 두부를 만드는 일들을 아궁이 불 땀 좋은 내가 했고.
해는 마냥 떳다 져도 사람은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수도 있어. 98년 11월 29일이였어. 어디서 거하게 취해서 친구 두 놈이랑 와서 더 마시겠다고 또 술상을 봐오더라고. 뻣뻣한 짧은 대답만 하면서 눈은 검벅 검벅 거리면서 새벽을 맞더라고. 다 잠들고 혼자 뭘 부스럭 부스럭 적어 대더니 갑자기 파카와 배낭을 걸치지도 않고 나가더라고. 새벽기차를 타고 또 소백산에 가는 구나 했거든. 역시나 막차를 타고 밤 9시가 넘어서야 돌아와서는 온기도 없는 방에 찬밥처럼 담겨서는 잠을 자더라고. 그날 마침 비둘기 열차가 마지막으로 다니던 날 이였어. 마지막인건 기차만은 아니었나 봐.
이듬해 양옥을 새로 짓기 전에 아직도 매끈하던 기와며 시간만큼 단단해지던 기둥이며 차돌같이 여물던 주춧돌을 왠 스님이 큰 트럭 여러 대에 추려서 가져갔어. 100년은 족히 된 호두나무를 시작해서 앞뜰 대추나무도 뒤뜰 은행나무며 감나무도 싹둑 잘려 나갔어. 나랑 안채가 허물어지고 이틀 뒤에 아이가 찾아 왔어. 아무것도 없고 내 살들이던 흙들만 무덤처럼 쌓여 있었지. 부슬부슬 오는 비 맞아서 피 같이 뻘건 황토 위에 가만히 손을 대고 안녕을 전하더니 부스스 일어나더라고. 아이가 어른이 되서 일어났지. 이제야.
아침이면 빨갛게 햇살 번진 창호지에 손을 대던 일도 비가 오면 남향 쪽문을 열어 손을 적시는 일도 애미가 아침 소반 마루에 올려 놓던 소리도 없을 테지만 아이의 유년 어디쯤에 책갈피를 꽂아 주고 싶었어. 죽을 만큼 아팠겠지만 그 상처로 빛이 들어오곤 하던 기억도 같이 남겨 주고 싶어서.
P.S
그리고 한 번도 찾아오진 않았지만 난 산청에서 스님들이랑 같이 잘 지내고 있어. 가끔 장터목 가는 길에 들를 법도 한데 아직은 못 찾아오는 맘도 알 것도 같고. 늦은 안부를 이제야 보내봐. 잘 지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