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가방'
어딘가로 들어가야 할 곳이 필요하다. 숨을 곳인가? 아니다, 쉴 곳이다. 그곳은 누구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나만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
다 함께 밥 먹고, 다 함께 앉아 티브이 보거나 누워 자던 곳에서 더 이상 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방이 생겼다. 형이 군에 간 날부터였다.
나의 방이 생겼다. 책상과 책장 그리고 침대는 형이 쓰던 그대로였지만 나에게는 그저 새로움이었다. 방 문을 열었을 때 나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거실에서 자고 일어나던 사춘기도 지나버린 나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형이 군에 가서 가라앉은 집안의 무거운 공기는 오히려 나를 띄워주고 있는 듯했다. 방바닥을 쓸고 닦고 괜히 책상 서랍도 열었다 닫아보고 삐걱대는 침대 밑에 종이를 접어 균형을 맞추기도 하고 책장을 옮겨 볼까? 작은 방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내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 누나가 있는 집에 막내에게는 방이 있다면 부자인 것이다. 부자가 아닌 우리 집에서 나만의 공간은 없었다. 큰 방이지만 크지 않은 안방에서 더 이상 잠을 자고 싶지 않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방보다 더 작은 방에서 침대하나 책상 하나만 들어가 있는 아주 작고 작은 화장실 옆 제일 작은 방은 누나가 쓴다. 그리고 좀 덜 작은 방에서 형이랑 지내면서 온갖 심부름에 종노릇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거실에 이불을 펼쳤다. 손님들 오시면 펼치던 작은 밥상은 나의 책상이 되었고 그 옆에 작은 가방에 나의 소중한 잡동사니를 다 넣어 두었었다. 그곳은 허허벌판 웅크리며 다가오는 사자무리나 끝까지 물어뜯는 하이에나로부터 숨을 곳도 숨길 수도 없는 아프리카였다. 아침에 스스로 눈을 뜰 수가 없다. 차가운 나무 위에서 한기를 느낄 때 주방에서 들리는 매서운 폭포소리를 외면하고 돌아 누우면 사정없이 내려쳐지는 번개가 내 등을 빨갛게 각인했다. 엄마는 매일매일을 그렇게 깨웠고 나는 그렇게 일어나야 했다. 눈을 떴으니 또 풀 뜯으러 가듯 학교 가서 물 마시러 강을 찾듯 집으로 오는 '누우' 같았다. 밤이 되어 내가 누우면 '쿵, 쾅' 코끼리가 지나간다. 맨날 먹기만 하는 형이다. 찬바람이 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곧 또 불어 닥칠 것이다. 살 빼겠다고 맨날 냉장고 앞에서 고민하는 원숭이 같은 누나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해가 지고 한 참이 지나면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는 박쥐는 나의 아버지다. 나의 거실은 그런 곳이었다.
잠들려고 하면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끼익'거리는 문 소리에 이불을 덮어쓰고 베개에 머리를 쳐 박아 봐도, 나오는 짜증은 멈출 수가 없었다. '아! 쫌. 잠 좀 자자.'라는 말을 하면 머리 위로 뭔가가 날아오거나 코끼리 발에 차이기를 3년은 하고서야 생긴 내방이었다. 그러니 형을 군에 데려가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독립투사가 되었다.
저녁을 먹고 방에 바로 들어간다. 저녁을 먹고도 끝나지 않던 나의 저녁식사 시간은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저녁시간은 끝이 나고 내 시간이 생긴 것이다. 텔레비전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날부터는 문을 잠가 마음을 숨겼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뒤적거려 봤지만 딱히 읽을 만한 것 없었다. 하지만 침대밑에서 찾은 신세계는 나의 방문을 더 걸어 잠그게 했고 나를 노래 부르게 했다. 그렇게 찾은 신세계 중에서 단연 최고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좋은 생각' 그리고 수영복도 벗은 여자의 사진만 있는 잡지였다. 나의 방문은 여섯 달 만에 열렸다. '방위라니? 세상 멀쩡한 저 인간이 왜 방위인가?' 신은 인간에게 환희와 기쁨을 주고 상실감을 준다. 그래서 나는 잔인한 신들을 다 버렸다. 더 이상 버릴 게 없으니 채울 것도 없었다. 가장 작은 나의 가방은 또 그렇게 사소한 것들로 채워져 나와 함께 아프리카로 동행하였다.
얼마 후 다시 형이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 후 서울로 취직해 갔고 그 방이 내 방이 되었지만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그 방에서의 신세계는 사라졌다. 구석에 놓인 작은 가방 속에 나의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은 그대로 있었으며 언제였을지 모를 날 버려진 나의 가장 작은 방. 나의 가방은 그렇게 사라져 갔다. 내 어린 날의 소중한 방에서의 추억처럼 나의 첫사랑처럼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