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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은 그대로다

몰랐던 것들- 너에 대해서- 다시 올라간다

by Goldlee

아직도 이별 중인가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랑했었나 봅니다.

다시 이별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나 봅니다.


노르웨이 숲을 읽고 난 누군가의 독서평이 나를 불러왔다. 그때의 너와 함께 있던 나를 불러왔다.


오랜만에 올랐다. 앞산. 대통령 선거날 투표부터 하고 갈려는 계획은 일어나 보니 사라지고 늦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나의 이동시간은 정해져 있다. 집에서 앞산 촌돼지찌개(산 안에 왜 식당이 있을까?) 식당 앞까지 30분 걸린다. 정확히 도착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고개까지 따라가며 쳐다봤다.


오르기 전 간단히 인사하는 자리에서 간단히 불리던 이름을 말하고 목례든 손짓이든 하고 나서 발 하나씩 모아 사진 찍고 출발한다. 등산모임에서 출발할 때 인증사진을 찍는 스타일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소개할 때 잠시 벗은 마스크 때문인지 출발할 때 말을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은 반갑게 인사한다.

"몰라봤어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형님!"

"어! 그래. 잘 지냈지?"

"형님도 잘 지내셨어요."

"그냥 그렇지. 뭐!"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해 주는 그가 난 누군지 잘 모른다.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봤고 이름이 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소식 들었었어요. 그때 이후로 등산은 안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여기서 뵙네요."

"그랬지. 다시 산에 올라가 보고 싶어서. 대통령도 새로 뽑히잖아."라고 하면서 오른쪽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기라.'라는 조폭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났다. 나의 명분은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확신해서였고 나에게도 새 세상을 시작을 알리기 위함이라고 짧은 순간에 다짐해 버렸다.

궁금했지만 설마 이렇게 알려 주리라고는 당황스러웠다. 미세먼지 가득한 뿌연 대구 도심을 보면서 '오늘 참 날씨 좋다.'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여러 번 바뀌던데요. 복잡해요. 소문이."

"굳이 안 알려줘도 되는데."

"그래서 그동안 혼자 지내셨어요. 연애는 안 하시고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어. 이제 찾아볼까?"

"어떻게 2년을 혼자 지낼 수가 있어요. 전 이해가 안 되네. 한 명은 있어야죠."

내가 고개 돌려 꼬나봤다. 잠깐 쉬더니 다시 말한다.

"그런 관계 말고요. 적당히 넘지 않는 선에서 만나는 관계는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섹스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관계?'는 뭘까 더 궁금했다.

그냥 한 번 더 꼬나봤다.

"이해가 안되지 않나요. 이 나이에 빠져들고 기대하고 빠져들다니 다시 사랑할 순 없잖아요."

"사람마다 다르니 사랑이 다르지. 그냥 나는 그랬어. 사랑하는 데 빠져들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뭐 때문에 사랑하는 거야. 밥사고 술 사주고 옷 사주고 선물하고 그냥 돈 주고 사면 되는 파트너는 많지 않을까?"

괜히 말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인데 왜 나를 말하게 하는 건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전망대 바로 아래 있는 나무에 걸린 휴지를 쳐다보며 '병신 같은 것들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눈앞에서 사라지면 끝인 거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보면서 인상 찌푸리게 만드는 병신 같은 것들' 속으로 외쳤다. 계속 그 휴지는 태풍이 올 때까지 거기에 머무를 것 같았다.

단발이었다. 토끼전망대에서 단체 사진을 찍자는 리더의 외침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다시 마스크를 썼다. 내 앞을 지나가는 단발머리의 그녀는 내 옆에 섰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녀를 따라갔으니 내가 그녀의 옆에 섰다. 손가락을 아래도 펼쳐서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하산하자고 한다. 정상을 가도 되냐고 물으니 하산은 자유롭게 하시면 된다고 한다. 토끼전망대에서 인사하고 혼자 정상으로 향했다. 수십 번 아니 백번은 넘게 갔을 앞산 정상이었고 안 가도 될 정상인데 누군지 생각난 기억나지 않던 그와 같이 내려가기 싫어서였는지 단발머리의 그녀의 뒤를 쫓아갈 게 뻔한 내가 싫어서 정상으로 간 것 같다.

내리막도 숨이 찰 수 있다. 일출을 보려고 올라가서는 올라오는 해를 보고 넋 놓고 있으면 빠듯한 시간에 뛰어내려 가길 여러 번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앞산이 내 것 같았다. 내가 뛰면 나보다 더 빨리 뛰던 그녀는 항상 나보다 빠르고 싶었다. 오를 때도 내 앞에 항상 있길 좋아했고 내려올 때도 항상 먼저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지켜주고 싶은데 나보다 더 강한 그녀를 지켜주지 못하니 항상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나 데려갈 것만 같았다. 못난 남자였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서둘렀다. 뛰었다. 숨이 차니 멈춰 섰다. 그리고 내 앞에 있던 단발머리를 한 그녀에게 물었다.

"100대 명산 하세요."

"네."

"저도 합니다."

2년을 쉬었다. 평일 저녁에 앞산을, 와룡산을, 함지산을, 갓바위를, 삼필봉을 다니며 땀 흘리고 바람에 말렸고 주말이면 토요일은 전라도를 일요일엔 강원도를 가도 피곤한지 모르고 좋았었다. 2년 전이었다.

천천히 숨 고르며 내려가는 내 발걸음은 좁은 등산로의 가장자리의 돌들을 밟고 있었다. 마주치는 등산객의 짜증 나는 표정에 살짝 길을 내주긴 해도 다시 나란히 걸었다.

"몇 개 하셨어요."라고 따가워진 침묵이 내 귀를 두드렸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1년 바짝 하다가 2년 쉬었거든요."라며 애써 변명한다. '쉬었다는 핑계는 왜 헸을까?'

"아! 작년에 휴가 때 갑자기 강원도에 있는 산 11개를 탄 게 마지막이네요. 4일 동안 탔어요."라고 으스댔다. '자랑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 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의 창문은 활짝 열렸고 나에게 바람이 속삭인다. '넌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 들썩이는 중이잖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말, 똑같은 단발머리라니!'

쓸데없는 생각이 밀려올 때 기억나지 않던 그가 기억났다. 그가 말한다. 그녀에게 "다음에는 언제 오세요."라고 묻는다. 아무리 발걸음을 늦춰도 나란히 걸을 수 없다. 나의 귀는 한 발짝 뒤에 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와 함께 있던 너를 불러왔다. 그렇게 내려갔다.


앞산토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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