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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끝으로

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바람'

by Goldlee

'바람. 바라다. 바라므로. 바람이 불어오길, 바람이 불어주길 바라므로 그러므로 그래서 바람. 부탁한다. 바라지 마라. 뭘 바라는데. 바라는 게 이젠 없다.'


낙엽이 떨어지려면 한 참이나 남았던 그해 여름.

새벽부터 높은 건물에 낀 골목에서 연기를 뿜으며 저 끝으로 보내려고 숨과 함께 불어 본다. 연기는 한 발짝도 가지 못하고 내 얼굴을 때린다. 골목 끝 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은 뜨겁다. 그리고 부럽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태워 그곳으로 데려가려 한다. 알람소리에 몽롱한 바람이 에어컨 실외기 소리임을 깨닫고 시계를 보고 담배 끝을 튕겨 끄고 올라간다. 학원 다녔을 때가 그때가 생각난다.


대구는 덥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뭐가 그리 더운가 '왜 뉴스에서는 대구를 덥다고 유난인가?'라며 호들갑 떠는 모습들이 탐탁지 않았다. 평생 살았고 다른 곳에서 여름을 보낸 적이 없으니 어찌 알았겠는가. 다른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해보니 대구가 더운 게 아니라 다른 곳이 시원하다는 걸 알았다. 여름인데.

제대 후 석 달을 놀고먹으니 깡마른 장작이 물에 불은 건지 술에 젖은 건지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두 번 다시는 만들어지지 않을 복근마저 사라졌을 때 어학 학원 새벽반에 등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선이를 만났다.

세상 그 어떤 피곤과 게으름도 나를 깨웠다. 샤워를 하면서 면도도 하고 남방도 잘 다려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언제나 유선이 근처에 앉으려고 일찍 갔었다.

항상 웃고 있던 얼굴은 시무룩해지만 다시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영화 보기를 좋아해."

이 한마디에 영화를 예약하고 조조할인의 혜택에 감사하며 제일극장을 갔다. '달마야 놀자' 영화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한국영화는 시시해서 보지 않겠다는 망언을 잊은 채 그날의 제일 웃긴 영화를 선택한 나는 보기도 전부터 웃길 뿐이었다. 조조할인 영화도 시작하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할 게 없는 우리는 동성로를 배회했다.

닫혀있는 셔터문 위의 간판을 보며 "아! 이 집 맛있는데, 여기 가봤어? 먹고 싶다."라는 작은 꿈을 꾸며 밤새도록 불려 둔 것만 같은 오뎅을 먹고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신발을 끄는 우리를 지나치는 빠른 걸음의 스님들이 보이기도 했다.

"널 위해 준비했어."라는 말을 해도 될 만큼 극장 안은 사람이 없었다. 어둠이 익숙해질 때쯤 앞쪽에 앉은 아저씨와 아줌마뿐이었다. 지정석 따위는 지키고 싶지 않은 우리는 가장 한가운데에 가장 편한 자세로 불편한 좌석에 걸터앉았다. 뒤쪽 출입문의 불빛이 비치며 들어오는 반짝이는 머리를 보고 우리는 포복절도했다.

"저 스님들 설마 '달마야 놀자'를 보러 가는 건 아니겠지."라며 오면서 했던 말이다.

유선이의 웃는 소리에 입을 틀어막아도 새어 나오는 웃음에 또 웃었다. 그리고 조용하라는 아저씨의 버럭 하는 소리에도 웃었다. 우리 앞에 앉은 달마 아니 스님들은 영화 보는 내내 뒤통수로 우리를 웃겼다. 영화제작사에서 파견한 홍보팀일지도 모른다며 소곤거리면 웃었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에 스님의 머리가 비칠 때면 반사돼서 웃었고 화면에 까만 그림자에도 웃었다. 그래서 '달마야 놀자'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주말에도 만나자는 약속을 정하고 토요일에 세상에서 가장 멋 부린 차림으로 대구백화점 문 앞에서 만나 서로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놀라며 또 웃었다. 더운 날씨 탓에 짧은 옷차림의 또래의 젊은 연인들이 많이 보였다. 걸으면 걸을수록 유행에 뒤처진 느낌이 드는 내 옷차림을 신경 쓸 때 멈춰 선 곳은 학원에서 보이는 골목 끝이었다. 항상 학원에서 여기를 망원경처럼 멀리 바라봤었는데 여기서 보니 학원이 어찌나 가깝게 보이는지 가만히 서서 불어 가는 바람을 타고 싶었다. 유선이도 가만히 학원을 보고 있었다.

꿈같은 주말은 몇 번도 더 지나 다시 새벽. 골목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내 귓속을 간지럽히며 "고백해!"라고 응원하고 있었다. 담배연기를 골목 끝으로 보내며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과 대결할 때 아득히 먼 곳에 있던 그곳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마신 술에 새벽까지 갈 곳 없어 돌아다니는 남녀들이 자주 보였기에 그러려니 하며 강의실로 갔다.

한참을 오지 않는 유선이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 학원을 그만뒀다. 자꾸 골목 끝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배회하는 그때 그 여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난 도망쳤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 골목 끝으로 배회하는 유선이를 찾으려고 학원을 도망쳤고 불어도 불어도 제자리인 것만 같은 나의 한숨과 담배연기가 싫어 도망쳤었다.

지금도 도망치고 있는 것 같다.

가야할 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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