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모자'
등산모자를 사서 현관문에 걸어 두었다. 볼 때마다 '언제 등산 가서 사진 찍을까'라는 생각에 신이 났었다. 드디어 북한산의 '숨은벽'이라는 절경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문에 걸어 둔 모자를 등산가방으로 옮겨 걸었다. 가방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버스 안에는 무지개보다 더 많은 색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며칠 전에 뚜껑이 없는 고동색 모자를 샀다. 모자는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인사하며 즐거워했다. 걸을 때마다 모자가 흔들거리며 '나 좀 봐주세요! 저 신상이에요.'라고 말했다. 옆에 걸려 있는 지리산 반달곰인형은 '처음엔 다 그래.'라며 눈길도 주지 않는다. 새로 온 내 모자와는 달리 얼굴은 가리며 인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빨간색 모자를 쓴 사람이 돋보였다. 얼굴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했다. 투명인간이 '저 여기 있어요.'라고 표시한 것 같았다. 몸매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얇은 천 한 겹으로 온 몬을 가렸지만 몸의 선이 더 잘 보였다.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부족한 잠을 자기 위해 반가움은 잠시 접어두었다. 고속도로에 타이어 마찰 소리는 불빛이 사라진 버스 안으로 들어와 자장가를 불러줬다. 시끄러워 깼지만 자장가에 다시 잠드는 실랑이를 하다 보니 우리는 북한산에 도착했다.
큰 모자에 선글라스 그리고 마스크까지 쓴 사람들이 입구 간판을 보고 모여 섰다. 누가 누군지를 확인하기가 쉽지는 않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과 단체 사진을 찍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무슨 색 모자를 썼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를 보고 누군지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체사진을 찍고 오르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속은 투명할까 싶은 투명인간을 파헤쳐 보려고 빨간색 모자를 뒤 쫓아갔다.
산을 오르다 보면 서서히 벗겨지거나 벗는 것들이 있다. 마스크가 첫 번째다. 가파를수록 헐떡이는 숨을 이겨내기 위해 마스크가 먼저 벗겨진다. 스스로 벗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의 체력과 경력이 벗겨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크림이다. 뜨거워진 몸은 땀으로 선크림의 가면을 벗는다. 잠시 쉬어 간다는 말이 나오면 다시 가면을 씌우기 위해 손이 바쁘다. 또다시 감추기 위해서 인지 햇볕에 노출되고 싶지 않아서 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꼭 이럴 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선크림 안 발라도 돼!"라고 하는 상남자. 그의 새까맣고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보면서 한 번 더 바른다. 세 번째는 선글라스다.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누군가 사진을 찍어주는 분이 "다음."이라고 외치면, 가서 서 있으면 찍힌다. 여기서는 독사진을 찍기 위해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때서야 자신이 누군지 알려야 하기 때문에 가장 오래 벗겨지고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친한 척 다가와 같이 사진 찍자며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쓰게 된다. 마지막은 모자다. 집에 가서 벗는다. 모든 이에게 감지 않은 머리의 향긋함을 화려한 색으로 가리기 위해서 등산 중에는 벗지 않는다. 누군가가 벗기지 않는 한은 말이다. 정상에서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내며 단체사진을 찍고 내려간다.
머리를 감고 와서인지 햇볕이 없어서 인지 내 머리에는 모자가 없다. 뒤 따라오던 투명인간에게 "모자 예쁘네요."라는 인사를 받고 웃으며 대답했다.
"새로 샀어요. 신상이랍니다."
"아! 저도 같은 브랜드, 같은 색의 모자가 있어요. 색을 통일하셨네요. "
"온통 고동색으로 깔맞춤 했답니다."
"유행 지난 색인데 옛날사람이시네요."
"아! 네. 그런가 봅니다."
머쓱했다. 침묵이 내 귀를 노크했다. 입을 열고 반격했다.
"햇볕도 없는데 모자는 왜 쓰고 계세요."
"나 좀 보라고요."
"네?"
"나 좀 봐주시라고 썼어요."
"근데 왜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한 겁니까. 그러면 못 보잖아요."
"벗길 사람이면 벗기겠죠. 가린 게 아니라 벗을 수 없는 거예요."
"네? 벗길 사람? 누가 벗기는데요."
"내 속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벗기겠죠. 내 가면은 내가 벗을 수 없으니깐요."
"아! 그러시군요. 전 벗으면 투명인간이라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보이는데요."
"그래서 빨간 모자 쓰고 왔어요. 표시는 해 놔야 하니깐."
역시 투명인간이었다. 정상인인지 확인하려고 시도했지만 잠깐의 대화로는 속을 알 수 없는 투명인간이라는 결론이 났다. 옛날 동호회와는 다른 면의 온라인 커뮤니티 모임이구나 싶었다. 몇 가지 서로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느린 속도에 지친 나는 앞서가는 이들을 제쳐가며 빠르게 하산했다. 가방에 걸어 둔 모자를 떼어 손에 쥐고 있었다. 자랑하려고 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 걸기 귀찮아 손에 쥐고 흔들며 내려왔다. 산을 다 내려와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차에 오르고 출발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가방에도 손에도 모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화장실이 떠올랐지만 버스를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쓰고 다닐 모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가릴 것도 표시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와 타이어의 시끄러운 마찰음은 더 이상 들리지도 않는다. 자장가가 사라져 졸지도 않고 뜬 눈으로 대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충 인사하며 어둠 속으로 가린 것들을 벗어던지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