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퇴사 직후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명대사가 갑자기 생각난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
그렇게 다시 야생으로 나오게 되었다. 퇴사를 하고 1주일 동안은 뭐랄까 모든게 새로웠다. 1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조차 모르겠다. 군대에서 갓 전역하면 익숙해진 기상 시간 때문에 한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 처럼 똑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아무 스케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전7시에 눈이 딱 떠진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그냥 다시 자도 된다. 원래 같았으면 '더 자고 싶은데 회사 때려칠까' 라는 생각을 했을텐데 이젠 때려칠 것이 없다. 더이상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다.
퇴사를 하고나니 가장 좋았던 것이 있다면 어딜 가던 '웨이팅' 이란 것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출근해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 난 내가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유명한 카페나 맛집을 가도 기다리는 일이 거의 없고, 머리를 하러 가도 주말이 아니니 예약하기가 너무 수월하다. 심지어 국내 여행을 갈 때도 평일 가격으로 아주 저렴하게 호텔을 잡을 수도 있다. 세상에... 밖은 지옥이라던데, 오히려 천국인걸?
이 사실이 그저 새로울 뿐이 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소중한 나의 일상이 내 품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더 신기한 건 주변 직장인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하며 심지어 멋있다고 한다. 움... 글쎄 난 퇴사 밖에 한게 없는데. 그리고 어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나온게 아니라 정말 대책없이 퇴사한건데... 어쨌든 뭐, 퇴사하고 뭘 할진 정해지지 않았지만 당분간은 이 천국을 즐기기로 한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생각보다 시간은 더 빨리 갔고, 한달이 지나고 나니 퇴사 라이프가 무서울 정도로 적응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못만났던 사람들은 얼추 다 만난 것 같고, 가보고 싶었던 곳은 굳이 급하게 가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원할 때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한달이 지나고 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로 이직 준비를 해야하나? 이직을 한다면 어느 회사로 가야하지? 그럼 포트폴리오도 만들어야 할텐데. 포폴 안엔 어떤 프로젝트들을 넣어야 하지?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천국의 문이 닫히고 지옥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잔인하다. 천국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고작 1달 뿐이라니. 더 웃긴 사실은 한달 동안 펑펑 놀다보니 이 '노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그 달콤한 맛을 봐버렸다. 즉, 놀고는 싶고 이직은 해야할 것만 같은 부담감. 여기서 핵심은 이직을 '해야 한다' 가 아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땐 이 느낌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 줄 몰랐다.)
책상 앞에 의자를 바짝 붙여 앉는다. 1월1일에 산 새 다이어리를 꺼내든다. 퇴사를 1월에 했고 한달이 지났으니 벌써 2월.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할지 일정을 짜본다. 목표는 5개월 뒤 이직! 5개월 안에 이직을 하기 위해 5개월치 큼직큼직한 계획들을 정리한다. 마치 큰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작은 프로젝트들을 나열하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디자인 작업을 들어가기 전에 항상 어떤식으로 일을 진행할지 워크 플로우를 짰던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내 인생 계획을 짤 때 써먹을 줄이야. 나도 모르게 피식 하게 된다. 모든 계획이 다 그렇듯이 책상에 앉아서 15분만에 나의 앞으로 5개월을 짜버렸다. 다시 말하면 나의 5개월이 15분만에 정해졌단 소리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멍 때리게 되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거지. 뭔가 잘못된것 같단 느낌이 확 들었다. 왜 막 성공하는 방법을 다루는 유튜브나 책을 읽으면 항상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는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이다. 뭔 '내면의 소리?'는 개뿔 내 옆 사람 소리도 제대로 못듣는데 하며 웃어 넘기곤 했다. 놀랍게도 이 순간 이게 내면의 소리인가 싶었다. 계속 뭔가 잘못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라며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겪는 느낌이라 가볍게 무시해버린다.
그렇게 15분만에 짠 5개월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해가며 퇴사 3개월 차가 되었다.
지금이야 호텔을 세우고 싶다며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호텔을 사비털어 리뷰하는 '호텔리뷰어'가 되었지만 저 때 당시만 해도 호텔은 그냥 '취미' 였다. 그저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좋았고 그런 '경험'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아주 단순한 논리로 숙박예약중개하는 회사 '야xx'와 '데일리xx'에 지원하려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 포트폴리오는 새로운 신사업을 제안하는 포트폴리오 였으며 호텔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그동안 호텔을 다니며 불편했던 점들 아쉬웠던 점들을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자꾸 이걸 만들 때마다 몇 개월 전에 들었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포트폴리오의 진행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지금 이 포폴을 만드는게 맞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다시 책상에 의자를 바짝 땡겨 앉는다. 저번보다 더 바짝 땡겼다. 대체 그럼 문제가 뭐란 말인가. 난 그게 궁금하다. 왜 자꾸 나 자신에게 확신이 없을까. 5개월 안에 이직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면 만들 수록 '내가 호텔을 왜 좋아하지' 라는 질문에 답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이 질문에 답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데 면접관이 물어본다면 당연히 어설픈 핑계만 늘어뜨려 놓을 것이 분명하다.
한참을 이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러니 다른 생각들이 줄줄이 소세지 마냥 잇따라 온다. 호텔을 좋아하긴 하는걸까?, 그냥 취미 정도이지 않나?, 호텔에 미쳐있긴 한 걸까? 등등.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나는 뭘 좋아하는 것이며 뭘 잘하는 것일까를.
퇴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놀러다닌 것도 있지만 더 의미있는 시도는
바로 나에 대한 생각을 '시작' 했다는 것이다.
직장인일 땐 아침에 출근하랴 낮엔 일하랴 저녁엔 밥먹고 넷플릭스 보고 자랴.
나에 대한 생각을 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흘러가는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퇴사를 하고 나니 남들보다 상대적인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어차피 우리 모두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지지만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퇴사하고 나서 첫번째로 한 일 이다.
그리고 몇 일 뒤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내 인생의 방향을 또 다시 틀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만들고 있던 포트폴리오를 중단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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