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에 후원하셨습니까?
문이 열리자 승복을 차려입은 이사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툼한 서류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어느 회의실이었다. 불교계의 큰 스님이자 나눔의 집의 이사장인 송월주 스님부터 현 조계종 총무 원장인 원행 스님. 거기에 이름만대도 다 알만한 대학교의 총장과 유명 복지관의 이사장까지. 나눔의 집 이사진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이들은 짧게 찬불가를 부르더니, 길쭉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묵직한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눔의 집 소장에게 올해 후원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또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고받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정성 들여 깎은 여러 종류의 과일들과 다양한 음료가 놓여있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중요 사안을 의결할 때마다 마치 판사가 법봉을 내리치듯 목탁을 두드린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렵게 확보한 자료는 2013년부터 최근 2019년까지, 지난 수년간의 이사회가 고스란히 담긴 영상 파일이었다. 원래 사회복지법인은 매년 이사회의 주요 내용을 회의록에 남기도록 되어있다. 주요 내용이라 하면 보통 어떤 이사들이 참석했는지 또 어떤 내용을 논의했는지 정도다. 그래서 이사회의록을 보면 이 법인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뿐이다. 이 회의록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고, 외부에 공개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은밀한 내용이나 공개하기 불편한 내용들은 잘 기록되지 않는 편이다.
법인 나눔의 집을 취재하면서 제일 처음 들여다본 것도 바로 이 회의록이었다. 역시 회의록만 봤을 때는 특별히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착실히 후원금을 모으고 있는 거대한 복지법인이구나’라는 느낌 정도? 하지만 이사회의 모든 순간이 담긴 영상은 완전히 달랐다. 엉성한 회의록을 가면처럼 쓰고 있던 나눔의 집의 이사들은 이 영상 속에서 나의 모든 의문과 궁금증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아마 이 영상이 세상에 공개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 같다.
이사들의 계획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자면 ‘호텔식 요양원’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후원금을 최대한 모으고 아껴서 이 곳에 그럴싸한 요양원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백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요양원이었다. 이 큰 그림을 위해 이들이 세운 목표액은 무려 100억 원. 최근까지 72억 원도 넘는 후원금이 쌓였으니 불가능한 목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눔의 집에서는 할머니들께 도가니탕 한 그릇도 제대로 사드리지 못하는, 제 때 병원에도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다.
비어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토록 후원금을 아껴야만 했는지. 또 왜 그토록 넓은 땅이 필요했는지. 생활관의 정원을 20명으로 늘리는 증축 공사나 주차장 부지를 구입한 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전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더 모시겠다는 말도 또 평화인권센터를 세우겠다는 말도 이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법인이 자신들의 자본을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하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이라는 법인은 다르다. 이 곳에는 사회복지법인으로서,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모시는 시설로서 마땅히 준수해야 할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또 따라야 할 도덕적인 의무와 막중한 사명이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얘기하는 30억이라느니 100억이라느니 하는 돈은 후원자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행복을 위해 기부한 ‘후원금’ 아닌가. 그런데 이 후원금으로 100억 대의 호텔식 일반 요양원을 짓겠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충격적인 대화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래서 우리는 수년간 촬영된 이사들의 발언을 전부 글로 옮기기로 했다. 이를 '프리뷰' 작업이라고 한다. 프리뷰 작업을 하면 영상 속 피사체가 발언한 모든 단어와 행동들이 문서 파일로 정리된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든 영상의 내용을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또 필요한 내용들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문서만 수백 장이 넘었다. 우리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모든 문장을 읽어나갔다.
며칠에 걸쳐 프리뷰 파일과 영상 파일을 검토하던 중 눈길이 머무르는 곳이 있었다. 2019년도 이사회였다. 이 날 회의에서는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등장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어떤 이사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녹음만 하지? 영상 찍지 말고
그러자 촬영하고 있던 어떤 인물이 덜컹거리며 카메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카메라는 각종 음료와 간식거리들이 정갈하게 올려져 있던 회의 테이블에서 고개를 돌려 책장을 향했다. 그러더니 이사들은 더욱 노골적인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에는 커다란 TV가 한 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모니터에는 이사들이 서로 맞장구치는 모습들, 거리낌 없이 내뱉는 망언들이 그대로 비쳤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물 한 모금과 과일 한 조각. 껄껄거리며 회의실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하나하나가 나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더 잘 모시겠다며 온갖 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하고, 정부의 지원금을 받거나 더 많은 후원금을 모아 온 사람들이 속으로는 이런 추악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정작 할머니들의 건강이나 위안부 역사 보존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방송에는 담지 못했지만 ‘위안부 역사관’ 입장료를 더 모아서 회식을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들의 관심사는 온통 돈. 돈. 돈이었다. 대체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이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여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TV 모니터 쪽으로 최대한 줌(Zoom in)을 넣어서 이들의 실체를 최대한 방송에 담기로 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법인의 정관이었다. 정관의 사업 목적을 살펴보니 이 시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1996년 최초 정관을 보면 이곳의 사업목적 1순위는 역시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요양시설’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최근 정관에는 그 표현 자체가 빠져버렸고,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위한 무료양로시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나마 4번에 가서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운영이라는 목적만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법인의 큰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은 또 있었다. 최근 이사회에서 또다시 정관을 개정했는데, 그나마 ‘무료’ 양로시설이라고 되어있던 사업 목적에서 ‘무료’라는 표현마저도 삭제해버렸다. 그렇다면 결국 이곳 나눔의 집은 마음먹기에 따라 상업시설이 될 수 도 있다는 얘기다. 무려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100억대 호텔식 요양원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것도 온전히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말이다.
이사회의 믿기 힘든 발언을 모두 체크하고 정리해둔 날. 그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너무 큰 배신감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것도 불교계의 큰 스님들이? 법인 이사들에게 공식 입장을 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후원자들을 대신해 반드시 따져 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명확한 영상 증거도 있으니 아무리 대단한 이사들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먹구름 같은 두려움이 슬금슬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악몽을 꾸기 전의 불안함이라고 해야 할까. 화려한 이사들의 얼굴을 보고 나니 솔직히 그런 심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이 막강한 이사들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 한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까? 이사진에는 조계종의 핵심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나눔의 집의 원장을 지냈던 원행스님은 현재 조계종의 총무원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조계종과의 마찰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당연히 소송도 각오해야 했다.
탐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다 보면 실제로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방송을 준비한다고 해도 '언론중재'가 들어오거나 관련 소송이 들어오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탐사 프로그램 연출을 맡고, 첫 고소장을 받은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4년 전쯤이었을까. 등기가 왔으니 로비로 내려와 달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 날은 정확히 내 생일날이었다. 당연히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며 단숨에 로비로 뛰어내려 갔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케이크도 선물도 아닌 노란 서류 봉투에 담긴 고소장이었다. 시무룩한 내 등을 토닥이며 팀장이 건넨 한 마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야 진짜 PD가 됐네'
그 후 한 두 차례 언론중재와 소송을 더 겪었다. 최근에는 성소수자 아이템을 두고 어느 교회와 약 1년간 소송을 이어오기도 했다. 모두 승소하긴 했지만 매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지 다짐하며 책상에 고소장 봉투를 붙여두기도 했다. 물론 치밀하게 방송을 제작했다면 재판 결과를 걱정하거나, 그 과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간 이어지는 재판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담당 PD는 계속해서 입장을 정리해야 하고 또 상대의 주장에는 단어 하나하나까지 반박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다.
소송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다. 나도 나지만 이런 소송을 제기하는 분들의 마음도 분명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괴로울 것이다. 또 의도치 않은 이런저런 피해도 있었을 것이다. 방송 때문에 소송이 진행된다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소송이 두렵다고 방송을 대충 만들 수는 없다. 폼 잡으려는 건 아니지만 이게 탐사 프로그램 PD의 사명이자 고통이다. 그러니 탐사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는 완벽한 근거와 논리가 필요하다. 또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객관적인 균형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다음 날.
나는 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의 공식 입장과 반론을 들어보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또 팩트를 체크하기 위해 반론은 반드시 필요했다. 우선 지금까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식 질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질문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계종 홍보팀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취재가, MBC랑은 관계 회복이나 이런 것들이 안 되고 있어서요
2018년 <PD수첩>은 조계종 큰 스님들의 전반적인 의혹을 다룬 방송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 전 MBC 뉴스에서는 조계종의 템플 스테이와 관련된 보도도 있었다. 당시의 갈등과 마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지라, 역시 공식 답변이나 정식 인터뷰는 어려워 보였다. 특히 조계종과 <PD수첩>은 지금도 소송 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계종 홍보팀 사무실이 있는 조계사를 찾아갔다.
‘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의 공식 입장을 여쭤보러 왔는데요’
전화 통화로만 짧게 대화를 나눴던 홍보 팀장을 직접 만났다. 사전에 연락을 하고 방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편한 대화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마음 한 구석에는 이것저것 따져 묻고 싶은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럴 수 있는 대상도, 상황도 아니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간단했다. 왜 할머니들께 후원금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후원자들의 허락도 없이 후원금으로 요양원을 지으려고 하는지.
“거기는 별도의 법인이에요. 스님께서 개인적으로 거기 이사 역할을 하신 거지만 그쪽하고 일단 얘길 하시는 게 맞는 것 같고요”
“이사 스님들이 다 지금 여기 계시잖아요”
“원장스님만 계시는 거고. 그쪽하고 일단 얘기를 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홍보팀의 입장은 이랬다. 스님들이 이사로 있긴 하지만 나눔의 집은 엄연히 별도의 법인이기 때문에 조계종이 답변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러니 나눔의 집의 문제는 나눔의 집 소장에게 물으라고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들은 완강히 답변을 거부하며 나를 슬쩍 밀어내기 시작했다. 취재 중에 신체적인 접촉이 발생할 경우 저항하거나 물리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편이 좋다. 취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어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건물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들은 다시 한번 MBC의 취재에는 응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씁쓸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표정관리가 어려울 정도였다. 자주 겪는 일이라고는 해도 이번만큼은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이것이 법인의 답변이란 말인가? 나중의 일이지만 나는 나눔의 집 소장도 찾아갔다. 하지만 막상 소장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다시 법인에 가서 얘기하라며 화를 냈다. 하- 정말 탁구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나눔의 집이라는 시설과 법인은 후원금을 받을 때는 서로 한 몸인 척하더니, 막상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는 선을 긋거나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모양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방송은 어느새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 법인의 공식 입장은 없었다고 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달라붙어야 할 것인가. 사실 강력한 영상 증거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취재를 마무리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편집과 후반 작업에 시간과 체력을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PD가 방송 직전까지 취재에만 매달릴 경우 방송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제보자들의 얼굴이었다.
이들은 이 막막한 싸움에 생계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이 고난의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이들은 진심을 다해 묵묵히 걷고 있다. 제보자들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들이 이 제보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지 계산해 보는 것이다. 나눔의 집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고 이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도 나는 이 계산을 먼저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이들이 이번 제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직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후원자들의 권리뿐이었다. 그에 비해 그들이 잃을 수 있는 것은 너무 컸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설령 답변을 듣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책임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심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다해봤다는 것을 제보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저 적당히 하고 멈춰버리면 이 문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흩어져 버릴게 뻔해 보였다. 그렇다면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라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들은 지금 할머니와 후원자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하려고 굳게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전 나눔의 집 원장이자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스님의 스케줄을 체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외부 일정은 취소되는 분위기였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불교 관련 언론사에 도움을 요청했다. ‘혹시 불교 관련 행사 잡힌 것 좀 없을까요?’ 며칠 뒤 답장이 왔다.
‘금요일에 국회에서 봉축 점등 행사가 있을 것 같아요. 원장 스님도 아마 참석하실 겁니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는 국회에서 점등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는 국회의장을 포함한 다수의 국회의원들 그리고 조계종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다. 코로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워낙 중요한 행사라 다행히(?) 쉽게 취소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요일'이라면 당장 이틀 뒤였고 방송 5일 전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부터 흐리더니 하필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촬영 대상들이 우산을 쓰는 터에 인물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렵고, 장비를 관리하기도 까다롭다. 기껏 촬영 잘하고 나서 메모리 카드가 망가져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걱정이었다. 장비도 장비지만 행사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빗줄기가 놀리듯 오락가락하며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빨리 편집해야 하는데, 막상 국회까지 갔다가 허탕만 치고 오면 어쩌지. 그래도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뭐든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우리는 행사 계획표를 어렵게 확보했다. 그 표에 따르면 조계종의 총무원장인 원행스님은 행사 1시간쯤 전에 국회 본회의장에 도착해 국회의장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보다 조금 일찍 국회에 도착했다. 지나는 길에 국회 중앙 광장을 훑어보니 행사를 위한 천막들이 설치되고 있었다. 행사가 취소되지 않을 거라는 반가운 증거였다. 우리는 총무원장이 본회의장에 들어가는 순간, 혹은 본회의장에서 행사장으로 나오는 순간에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행사 1시간 전.
우리는 국회 본회의장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바로 입구가 여러 개라는 것이었다. 직접 확인해보니 이용할 수 있는 입구는 최소 3곳 이상이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딱 두대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총무원장이 어느 입구로 어떻게 들어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굳이 비를 맞으면서까지 정문을 이용할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회의장의 여러 입구를 길 잃은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는 사이 스님이 도착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결정은 내리지 못한 채 빗줄기만 굵어지고 있었다.
도착 5분 전.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계종의 총무원장이 쪽문이나, 지하 입구로 국회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비가 쏟아진다 한들 분명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도 있을 테고, 국회 의장을 만나는 길인데 당연히 정문으로 당당하게 입장하지 않을까. 고민 끝에 본회의장 정문에 대기하며 총무원장이 오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질문은 총무원장이 다시 행사장으로 나올 때 던지기로 결정했다. 입구에서 본회의장까지는 동선이 너무 짧기 때문에 충분히 질문을 던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 앞에 국회의원들과 많은 직원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
검은 차량이 여러 대 들어섰다. 각 차량에서는 불교계의 큰 스님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의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를 다 같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차량이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문이 열리고 하얀 법복을 입은 스님이 차에서 내렸다. 원행 스님이었다. 주변에서 우산을 씌워주는 터에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흐린 하늘을 뒤로 유독 하얗게 잘 다려진 법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준비한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만남 5분 전.
나는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그 거대한 계단 앞에서 원행 스님을 기다렸다. 비가 그치지 않는 바람에 카메라는 주변에 정차해둔 차 안에서 촬영하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무서웠다. 아무리 던져야 할 명확한 질문이 있다고 해도 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수많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정확히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 던진다 한들 그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너무 긴장돼서 질문하는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리진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꼭 묻고 싶은 질문을 머릿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다.
정말 나눔의 집에 후원금으로 요양원 지으실 건가요?
국회 계단 너머로 검은 우산을 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 검은 우산들이 마치 무슨 파도나 먹구름처럼 보였다. 약속대로 카메라 감독이 차에서 재빨리 내렸다. 그리고 나는 원행 스님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전 세계 후원자들을 대신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단단해졌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고 또 비슷한 우산을 들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막상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등 뒤로 갑자기 물줄기가 쭉- 흘러내렸다.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누가 원행스님이지? 엉뚱한 사람한테 엉뚱한 질문만 하다 끌려 나오면 어쩌지?
하지만 인파 속 정중앙에 유난히 새하얀 법복을 입은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또 유일하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스님이 보였다. 바로 나눔의 집의 전 원장이자, 이사 그리고 현 조계종의 총무원장인 원행스님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수백 번 반복했던 그 질문을 던졌다.
나눔의 집에 요양원 지으실 거예요?
나눔의 집에 후원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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