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에 후원하셨습니까?
나눔의 집 제보자들을 MBC 로비에서 만난 건 오후 2시쯤. 인터뷰는 황당함에 웃다가 또 속상함에 울다가 어느새 7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질문하는 나도 목이 잠기고 아플 정도였으니 쉴 새 없이 호소했던 제보자들은 오죽했을까. 이제는 기진맥진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할 얘기가 산더미처럼 남아있는 듯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건넸다.
딱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혹시 선생님들을 제보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 같은 게 있었나요?
궁금했다. 물론 할 이야기야 많았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카메라 앞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렇게까지 나서게 만든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 제보자 P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는 주차장에 버려진 수많은 짐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아- 할머님들 살림살이가 너무 낡아서 전부 처분하고 새 가구를 들이려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비도 쏟아지는데 버리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방치해둘리가 없지 않은가. 덮어둔 것이라고는 고작 얇은 비닐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종량제 봉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사진의 진실은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생활관 증축) 공사를 시작해야 하니까 방에 쌓아놓은 물건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몰래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그 방을 다 치워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냥 치운 것도 사진이라도 남겼으면, 사진도 안 남겼고요. 유리 같은 제품도 그냥 박스에 한꺼번에 넣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 깨지거나 망가지거나 이렇게 돼 버렸고요. 돌아가신 김군자 할머니 방은 문이 잠겨있었는데 열쇠를 찾지 못하니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다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8월 장마철에 물건이 야외 주차장으로 나와버리고, 할머니 물건이 다 섞인 상태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하며 말을 이어가던 제보자는 무릎 위에서 다부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제보자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돈이 없다 하더라도 운영진이라면 할머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저게 할머니 물건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저 물건은 다 분리는 못 하더라도 ‘지붕 있는 컨테이너를 섭외해서 거기에 보관을 해야 되겠다’ 이 정도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 어린애도 생각하는 상식이거든요. 그것도 안 했다는 게 나눔의 집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마인드 같은 게 보인다는 거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사진 속 물건들은 폐기물이 아니라 할머님들이 수십 년을 간직해온 소중한 물건들부터 직접 마련하신 살림살이. 그리고 여기저기서 보내온 작은 선물과 편지들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살아있는 역사가 모두 길바닥에 나앉아 비를 맞은 셈이다. 장마철 억수 같은 빗줄기가 얇은 비닐을 두들기며 냈을 두둑- 두둑- 하는 소리가 귓가에 맺히는 것 같았다.
생활관 증축공사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모시기 위해, 또 전국의 더 많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모시겠다는 명분으로 무리하게 진행됐다. 물론 그 이면에는 100억대 호텔식 일반 요양원이라는 완전히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할머니들의 살림살이며 소중한 물건들은 비에 젖거나 파손되고 말았다. 정작 할머니들을 위한 시설에서 할머니들의 작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참혹한 사진 앞에서 제보자들은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 역시 함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애써 담담해 보이려 했던 제보자들의 당찬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나는 이들의 솔직한 심정에 대해 묻고 싶어 졌다. 카메라 앞에 선 제보자가 아니라 할머니를 곁에서 모시는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한 직원이 붉어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뭐든 지금 생각나시는 거, 하고 싶으셨던 말씀 있으시다면 하시겠어요?
“속리산 할머니가 무릎이 아프시니까 도가니탕이 드시고 싶다는 거예요. 그거 먹으면 무릎에 좋다더라 해서. 어차피 말하면 돈 안 주니까. 할머니 도가니탕 먹는 돈 어차피 안 줄 거니까 제 돈으로 도가니탕을 사드렸어요. 할머니가 그때 너무 좋으셨나 봐요. 나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드신 거니까. 그게 너무 기억에 남으셨는지 그때부터 병원은 저랑만 간다고 떼를 쓰신 거예요. 그래서 병원을 모시고 가는데 병원이 목적이 아니신 거예요. 도가니탕이 목적이신 거예요.
그럼 할머니 도가니탕 먹으러 가자고 해서 병원일 빨리 끝내고, 또 늦게 오면 뭐라고 하니까. 빨리 끝내고 도가니탕 먹은 게 5, 6번 있었어요. 도가니탕 한 그릇에 18,000원이거든요. 할머님이 또 세 명이 가면 세 명이 다 앞에 그릇이 있어야 마음 편히 드시거든요. 그럼 제가 세 그릇 사면 저도 사실은 그때 당시 월급이 200만 원이 안 됐어요. 그 월급으로 할머니한테 한 달에 5, 6번 넘게 도가니탕을 사드린다는 게 사실 부담이긴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슬픈 게, 그때 몇 번은 돈이 저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할머니 오늘은 병원만 갔다 가자' 이렇게 얘기한 적이 몇 번 있거든요. 그게 지금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왜냐하면 이제 할머니가 도가니탕을 잘 못 드시는 건강 상태가 돼 버렸거든요. 그때 제가 조금 쓸 거 덜 쓰고 그냥 할머니 한 번 더 사드릴 걸. 그런 생각이 너무 나요. 너무 나요 진짜로. 그때 제가 그걸 돈이 아까워서 할머니한테 못 사드렸는데 지금은 할머니가 그걸 못 드시니까...”
그는 더 이상 눈물을 가두지 못했다. 울먹이는 그의 곁에서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제보자들도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질문을 건넸던 나도. 그리고 카메라를 돌리고 있던 감독도.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적막한 촬영장에는 내리지도 않는 빗소리만 계속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야속한 장맛비가 온종일 얇은 비닐을 두들겼던 그날. 제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국자며, 바가지며 들고 나와 빗물이 고이지 않게 퍼내는 일뿐이었다고 했다.
이번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방송에 담을 것인가?’였다. 아무래도 할머님들이 중심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할머님들의 입장을 담긴 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님들과 정식 인터뷰를 한 뒤, 그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해야 할까? 아니면 주변 인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담아내야 할까?
내가 고민을 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할머님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셨을 때, 자칫 후원금 욕심으로 비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문제는 본질을 벗어나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될지 모른다. 그럼 반대로 할머님들의 목소리를 배제한다면? 이 또한 판단이 쉽지 않았다. 할머님들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 특히 후원금과 나눔의 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그 내용이 빠져버린다면 이번 방송은 매우 공허한 외침에 그치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때였다.
“PD님 옥선 할머니가 하실 말씀 있다고 하시는데요.”
“지금요?”
“네네”
나눔의 집에서 추가 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촬영 중간에 잠깐 고민을 하느라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다. 그리고는 고민하던 나에게 인터뷰를 먼저 제안하신 것이다. 오랜 고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즉시 카메라를 세팅하고 인터뷰를 준비했다. 이럴 때는 일단 인터뷰를 진행한 뒤 나중에 다시 판단하는 게 좋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상황보다 더 좋은 방송 재료는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 장소로는 할머님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할머님의 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혹시 할머님께 실례가 되진 않을까, 머릿속으로 몇 가지 질문을 빠르게 검토했다. 묘한 긴장감과 걱정이 뒤섞이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그럼 딱 두, 세 가지만 여쭤볼게요.
난 그렇게 말해서 못 알아들어.
더 크게요?
네.
몇 가지만 여쭤볼게요. 소리 괜찮으세요? 제 목소리?
네, 물어보세요.
할머니 여기 이 나눔의 집에 언제 오셨는지 기억나세요?
기억할 거예요. 2000년 6월 1일에 이 집에 도착했어요. 난 이 집을 모르는데 이 집에서 되불러가지고, 내가 중국에 있는데 오래 있었어요. 왜 안 왔는가. 난 한국 안 가겠다고 왜 한국 안 가겠는가 하고 고향 가는데 고향 가기 싫어하는가 하고. 내가 여기(이마)에다가 위안부 간판을 써 붙이고 부모, 형제 얼굴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고 그래서 안 가고 난 중국에서 죽겠다고 그래서 안 나왔어요. 안 나왔는데 제가 위안부에서 나와서 남편을 했어요. 살림하다 하니까 오래 있었는데, 두 번째 또 되불러 들어가서 그래서 두 번째 2000년 6월 1일에 이 집에 도착했어요. 이 집에 도착해서 오늘날까지 있어요.
할머니 여기 계시는 동안은 어떠세요? 편하게 잘 지내고 계세요?
저 잘해주니까 뭐 몰라요. 우리 위안부 갔다 왔다고 그래 받들어 주는 모양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지. 원래 이 집이 좋은 집이에요.
얼마 전에 여기 공사한 적 있었죠?
네. 그래서 집을 수리하는 바람에 내 방에 물건이 제대로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이견이 있는데, 이 방 수리하면 가구를 사주기로 했어요. 근데 난 하나도 받은 일이 없어요. 우리 집에 없는 게 없어요. 몽땅 내 돈으로 다 사다 놓은 거죠. 휴지통 하나도 내 손으로 사놓은 거지. 사무실에서 사준 게 없어요. 근데 지금 제 물건이 다 나오지 않았어요. 이부자리도 안 나오고 옷도 한 보따리 하나도 안 나오고 시계고 뭐이고 제 물건이 다 안 나와요. 이 집 수리할 때 내 물건은 잡히지 말라 했는데 왜 잡혔는가. 시계가 팔목 시계가 있는데 우리 막내 동생이 지금도 양평에 있어요. 동생이 사준 건데 내가 그 불편하다고 그냥 여기다 뒀는데 그것도 안 나오지. 안 나오는 물건이 많아요 지금.
할머니 앞으로 이 나눔의 집이라는 소중한 공간이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한 번 여쭤보고 싶어요.
옛날엔 할머니들이 많았어요. 우리 집에 지금은 돌아가시고 이제 몇 분 안 계신데 할머니들이 모두 6분인데 모두 굉장히 누워요 앓고 하니까. 저도 건강치 못한 사람이에요. 근데 제 방이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이래 있으니까 옛날처럼 되지 못하니까 섭섭하지요. 할머니들 다 죽고 그때 다 죽고 몇이 안 남았거든. 앞으로 할머니 다 죽은 다음에 이제 오는 할머니도 없잖아. 다 죽은 다음에 이 집이 어떻게 되는가. 나눔의 집이 그냥 있어야 되죠. 그런데 요양원으로 변하면 안 되죠. 근데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에요.
많이 걱정되세요?
제가 듣는 바에 앞으로 할머니들 다 죽으면 이게 요양원이 된다 그래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위안부 역사가 그냥 있어야 되지. 위안부 역사가 어떤 역사인 줄 아나. 정말 뼈 아픈 역사예요. (눈물) 그 역사가 없어져서야. 미래에 없어지면 안 되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방도 진열을 해놓으라는 거예요.
할머님과의 인터뷰는 최대한 짧게 진행했다. 인터뷰가 길어지면 할머님 허리가 불편하실 것 같아서. 또 마음이 편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인터뷰보다 긴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이 날 내가 받았던 울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생생하게 내 온몸에 남아있다.
나는 할머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 순간 이 내용을 이번 방송의 마지막 장면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실제 방송에도 이옥선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맨 마지막에 그것도 딱 한 번만 사용했다. 이보다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할까. 그런 확신이 있었다.
위안부 역사가 어떤 역사인 줄 아나. 정말 뼈아픈 역사예요. 그 역사가 없어져서야. 미래에 없어지면 안 되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방도 진열을 해 놓으라는 거예요.
한참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옥선 할머니는 직원분들께 기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다고 수차례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유는 ‘속에 담아뒀어야 할 이야기를 너무 많이 꺼낸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직원들은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할머니의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한 변호사가 했던 말이 한 달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은 잘할 것이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눔의 집에서 벌어진 일들은 어찌 보면 그런 착각과 막연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착한 시설이니까 잘하겠지. 그러니 믿고 맡기면 알아서 하겠지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나눔의 집의 관리자들은 국민들의 막연한 믿음에 큰 실망을 안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님들께 큰 실례를 범한 것이다. 물론 위안부 문제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25년 전. 할머님들을 시설에 모시고, 전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공은 결코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은 분명 국가의 역할을 대신한 사람들이고,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역할과 기대가 커지는 것에 비해 그만큼의 책임과 제도는 한참이나 뒤쳐져 있었다. 어느새 나눔의 집은 겉과 속이 다른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할머님들을 곁에서 모셨던 나눔의 집의 사무국장. ‘할머님들 버릇 나빠진다’며 후원금을 아끼고 아꼈던 그녀의 책상 서랍에서는 외화 후원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13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엔화부터 언제,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달러에 상품권까지. 그 액수만 무려 천만 원이 넘었다. 수십 년간 현금으로 들어온 수많은 외화 후원금들은 그 총액이 얼마인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정확한 파악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제팀의 직원이자 일본인으로서 지난 십 수년간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알렸던 츠카사 씨. 그가 우연히 이 돈다발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이 문제는 지금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을지 모른다.
"자료를 찾다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현금. 그리고 이 현금도 일본에서 왔던 방문객들이 할머니들을 위해서 기부했던 후원금인데요. 그런 현금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왔기 때문에 좀 놀랐습니다. 지금 2020년이잖아요. 6년 전에 일본에서 왔던 방문객이 가져왔던 후원금이에요. 그 후원금이 할머니한테 쓰이지도 않고 그냥 방치했다는 거 알았기 때문에 제가 좀 열이 받았어요. 그건 할머니한테 좀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저희들이 좀 더 정확하게 잘 일 할 수 있었으면 이 후원금도 할머니들의 행복을 위해서 쓸 수 있었던 돈이거든요.
나눔의 집에 방문하는 일본 방문객들 경우에는 잘못된, 자기들의 잘못된 역사를 알면서 그 미안한 마음,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여기 할머니들이 계시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 지원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서 여기에 와서 후원해주시거든요. 그런 후원금을 우리가 받으면서 할머니들의 행복 위해서 원래 이런 후원금 써야 하는데 그렇게 쓰지도 않고 계속 오랫동안 한 6년 동안 이렇게 방치해왔다는 건 이해가 안 갑니다. 전 화가 나요"
제보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사무국장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병가를 냈다. 그런데 소장은 관련 문제에 대한 특별한 조사도 없이 긴 휴가를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랜 컴퓨터 작업으로 몸이 편치 않다는 사무국장을 위해 산업재해 신청서까지 작성해줬다(물론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 후 그녀는 6개월 이상 출근을 하지 않았고, 결국 제보자들은 사무국장을 고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국을 다니며 그녀의 행방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렵게 연락이 닿았을 때, 사무국장은 현재 경찰 수사 중이기 때문에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역시 수십 년 동안 할머님들의 곁을 지켰던 나눔의 집의 소장. 나눔의 집의 얼굴이자 책임자였던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눔의 집의 주차장 부지를 개인명의로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후원금으로 구입한 땅이었다. 관련 행정 처리 비용 역시 모두 후원금 계좌에서 지출됐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나눔의 집으로 들어온 홍삼이며 과일, 온수 매트에 쌀 까지 꽤 많은 후원품들을 자신의 차에 실어 가져 갔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눔의 집에 보도블록 교체 공사가 있었는데 소장이 남은 보도블록을 트럭에 실어 어딘가로 가져간 것이다. 직접 보도블록을 날랐던 전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언제 한 번 소장님이 밥 먹고 퇴근하기 전에 자기를 좀 도와달래요. 저랑 이제 다른 사회복무요원 한 명 이렇게 둘이서 출근했던 날이었는데. 도와 달라 그래서 뭔 일 시키나 보다 했었는데, 저희가 행사 같은 거 할 때 나눔의 집에 있는 차들이 다 스타렉스나 이런 거라서 짐을 실을 수 있는 용달 같은 건 없어요. 짐을 실어야 할 때는 나눔의 집 주변에 이장님이 계시거든요. 그 이장님의 차, 트럭을 빌려서 그런 걸 실어 나르곤 해요. 이장님께 부탁드려서 트럭을 빌려 오더라고요. 그 트럭을 빌려와서 이제.. 한 4시 정도부터 보도블록을 쌓기 시작했어요. 거기 있던 보도블록들을. 트럭에 실어 옮겼죠.
트럭은 몇 톤이죠?
봉고 트럭이면 그게 1톤? 그 트럭 가져와서 저랑 사회복무요원 두 명이랑 소장님이랑 세 명이서 옮겼거든요. 원래 소장님이 그런 일 같은 거 몸 쓰는 일 같은 거 할 때 절대 안 도와주세요. 선생님들은 지나가면서 저희가 쓸고 있거나 나르고 있거나 하면 도와주시거나 하시는데 소장님은 절대로 그런 거 안 도와주세요. 진짜 제가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처음 소장님이 목장갑 끼는 걸 봤거든요. 실을 때도 성한 것들로만 실으라고 사각형에 예쁜 놈들만 실으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골라내면서 손도 좀 다치고 했죠.
성한 것들로만?
한 단으로 시작해서 여기서(트럭 적재함 바닥)부터 6층 정돈데 이미 소장님이 (트럭) 위로 올라가 있었고 거기서 소장님은 받아서 쌓는 역할을 했었고 저랑 다른 사회복무요원은 골라와서 소장님한테 던져주는 걸로 했는데. 층으로 봤을 때도 양이 꽤 된다 싶을 정도로 많이. 저희는 이미 퇴근시간 오버해서까지 차에 실었고요. 분명 이 보도블록은 나눔의 집 돈으로 샀을 거잖아요. 당연히 나눔의 집 돈으로 샀을 거고 한데 이걸 왜 거기다 쓰지? 이런 의문이 많이 들었죠.
이 보도블록들은 대체 어디로 흘러갔을까? 궁금했다. 물론 모두 후원금으로 구입한 자재들이었다.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횡령에 해당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나는 소장과 관련된 모든 주소, 잠깐이라도 언급되거나, 개인 블로그에 등장하는 어떤 장소들. 또 어디 간단하게 메모라도 되어있는 단서라는 단서는 모두 긁어모았다. 그리고 로드뷰로 해당 주소들을 모두 훑어봤다. 그러던 중 아주 흥미로운 장소를 하나 발견했다.
소장 아내 명의로 된 주택(증언에 따르면 소장의 '별장')이 하나 있었다. 나는 로드뷰에 주소를 찍고 성큼성큼 그곳으로 다가갔다. 드디어 그 집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집 마당에는 열심히 보도블록을 깔고 있는 한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로드뷰 촬영 날짜는 2019년 6월. 소장이 보도블록을 가져갔던 시점과 일치했다. 모자이크 탓에 소장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바로 이 '별장'으로 향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로드뷰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그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똑같이 생긴 집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역시나 보도블록이 넓게 깔려있었다. 나눔의 집에서 봤던 보도블록과 똑같이 생긴 것들이었다. 나는 현장 가까이서 그 보도블록을 촬영했고, 나눔의 집 관계자들과 이 보도블록들을 직접 날랐던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다시 확인했다.
네 맞아요. 그거예요
물어볼게 많았다. 그리고 대답을 꼭 들어야만 했다. 나는 이제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촬영차 여러 번 드나들었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장이 있는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혹시 소장님 계세요?
지금 안 계시는데요?
어디 가셨어요?
잠깐 외근 나가셨는데, 외근 나가셨어요
나눔의 집에 문제가 발생하자, 최근 이사진은 새로운 회계 직원을 채용했다. 이 직원은 나에게 소장이 외근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분명 업무 시간이었고, 시설 내에 소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황이었다. 직원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물러나지 않고 사무실 안 쪽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문 너머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소장의 모습이 보였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MBC에서 나왔는데요. 몇 가지 여쭤보려고 나왔거든요. 후원금 사용 관련해서
후원금은 난 몰라
왜 모르세요?
저는 시설만 담당하거든요
후원금이 시설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아니 아니요 법인에 들어와요
여기 시설장이시잖아요
시설장은 시설에 관한 것만 하는 거지 후원금 관리는 안 해요
갑자기 소장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배가 아프다며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장이 나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몇 가지만 확인하고 가겠다. 후원자들에게는 알 권리가 있다. 그렇게 화장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자 소장이 나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사무국장 자리에서 1천만 원 넘게 발견됐는데.
그래서 저 친구들(내부 고발자)이 사무국장을 고발해서 조사 중에 있거든요. 지켜보자, 그렇게 지금 얘기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자기네가 고발했어요 그 부분에서. 여러 가지를 다 해서. 그러면 경찰에서 지금 조사를 하고 있으니까 지켜봐야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된 거죠.
그래도 시설장이시면 후원금에 대해서 투명하게 운영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동안 투명하게 했죠. 그런데 일부 저렇게 된 것에 대해선 회계 담당이 매번 은행에 못 가니까 그렇게 한 거고, 그리고 그걸 갖고 본인이 횡령하려면 돈을 거기다 넣어놨겠어요?
선생님께서 일반 할머니들 모셔오라고 지시하셨다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도 전국 열여덟 분이 생존해 계시잖아요. 그분들을 모시는 마음으로 증축한 거예요.
일반 할머니들 모셔오라고 회의 때 몇 차례 말씀하셨잖아요.
정 안 되면 그렇게 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라고 하다가
그건 후원자 분들 취지와 후원 목적과 너무 안 맞는 것 아닌가요?
직원들이 그렇게 항의하니까 그건 뭐 제가 알았다 그러면 일반 분들은 못 모시겠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제가
지난 이사회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호텔식으로 지어야 된다 등등.
사회적 역할을 해야 되니까 옮겼을 때 잘 지으란 뜻이지 이걸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정원도 그대로 10명이에요.
이런 내용들을 후원자 분들이 알고 계신가요?
그 후원자들이 어떻게 다 알겠어요.
후원자 분들이 알 권리가 있죠. (중략) 제가 그 서류 봤는데 유재석 씨 지정후원금 사용하셨는데, 혹시 본인 동의받으신 거예요?
동의를 못 받을 것 같아요. 그건 시에다 해명을 했어요. 그래서 시도 지적하시더라고. 내가 동의서를 조작했다면 문제가 되지만 앞에는 첨부한다고 했지만 뒤에는 없으니까. 왜 그러냐 해서 솔직히 동의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뺐어요. 그렇더라고. 알았다 저희가 유재석 씨가 꾸준히 하니까 할머니들 생활공간 증축하는 거니까 좋은 뜻에 쓰면 이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제가 원래는 미리 동의를 받아야 했어야 되는데 될 줄 알았는데 안 돼서 죄송하다고...
소장은 몇 가지 답변을 더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고, 또 시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다만 후원자들에게 하실 말씀 없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리고 할머님들께 하실 말씀 없느냐는 나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소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국회
나눔의 집의 전 원장이자 이사. 그리고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스님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많은 걱정과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이제 정말 책임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 곳 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아니 어쩌면 이 문제를 책임자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긴장됐다. 질문을 똑바로 던질 수 있을지. 또 이렇게 질문을 해도 되는 건지.
머릿속으로 꼭 던져야 할 질문을 되뇌었다. 어차피 차분한 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경우, 방송에는 피디의 행동과 질문이 중심이 된다. 실수하지 않도록. 또 이 마지막 기회를 망치지 않으려면 질문을 계속해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취재 윤리를 위반하는 과도한 행동 또한 금물이다.
만남 그리고 질문
계단 너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검은 우산을 쓴 많은 사람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 하얗게 잘 다려진 법복을 입은 원행스님이 보였다. 나는 원행스님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위협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갔다. 원행스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수백 번 연습해둔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짧게 '네?'라고 당황한 듯 되물었다. 하지만 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경호원들이 사정없이 밀치는 바람에 '차분한 대화'는 이어갈 수 없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유유히 행사장으로 향하는 스님에게 끝까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뒷모습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스님은 수많은 불교계 사람들 그리고 국회의원들과 함께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분한 마음에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경호원들이 다가와 밀치며 소리를 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몸은 흠뻑 젖어있었다. 빗속에서 사정없이 밀리고 우산으로 치이는 터에 바지며 옷이며 엉망이었다. 같이 비를 맞았던 카메라를 확인했다. 다행히 촬영본에는 이상이 없었다.
차에 올라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분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어쨌든 이젠 정말 끝났구나. 실랑이를 하느라 몸에서는 뜨거운 열이 났다. 에어컨을 틀자 젖은 몸에서는 소름이 오싹했다. 차창으로 빗줄기가 계속해서 후드득 쏟아졌다.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을 보고 있자니 얇은 비닐을 세차게 두드렸던 야속한 장맛비가 떠올랐다.
방송 당일
방송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늘 그렇지만) 겪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에 맞춰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2부작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촬영 분량이 많았지만, 파급력 있는 방송을 위해 한편으로 압축했다. 사실 방송 직전까지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방송 당일까지도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작업을 멈추고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 최악의 경우 방송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문제없이 방송을 내보낼 수 있었다. 뒤늦게 조계종 측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해줄 것을 요구하는 다급한 연락이 오긴 했지만 방송을 막기 위한 시도는 없었다. 나는 이미 탄탄한 근거를 준비했고, 두 달 동안 꼼꼼하게 취재했으며 또 충분히 그들의 입장을 반영했다. 때문에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만큼 이번 방송에 자신이 있었다.
아마 나눔의 집 이사진들과 관리자들은 이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는 그래도 되겠지. 잘하고 있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험한 생각들은 지난 수십 년간 누구의 견제도 없이 단단히 쌓여 위험한 착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착각은 할머님들의 짐을 빗속에 내놓거나, 소중한 후원금을 여기저기에 방치해두거나, 후원품을 다른 곳으로 가져가거나, 그럴싸한 호텔식 요양원을 꿈꾸게 하거나 또 심지어는 할머님들께 '버릇 나빠진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할머님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건 제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이들의 용기와 진심에 이번 방송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보자들은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어쩌면 장마철 억수 같은 비를 온몸으로 맞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무엇보다 여섯 분의 할머님들이 1분 1초라도 더 빨리, 더 많이 행복하시길 바라며 이 험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이들이 힘을 내줬으면 좋겠다. 나도 끝까지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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