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공식

2장. 헬스라는 명상

by Jamie




레그프레스는 상체를 45도 정도 뒤로 눕혀서 고정한 채 하체를 단련하는 운동이다. 다리를 올려 위쪽에 있는 발판에 발을 놓고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발판 무게를 버텨야 한다. 발판을 발로 밀어 올리며 손잡이를 양쪽 바깥으로 돌리면 고정되어 있던 발판이 내려오면서 다리에 무게가 실린다. 다리 길이가 좀 모자란 나는 발판을 해체할 때 까치발로 밀어야 하는데 발가락을 다친 후로는 시작할 때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는 못나게도 도움받고 신세 지는 걸 불편해한다. 도움 없이 혼자 해 볼 방법이 없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그저 열심히 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이미 레그컬, 스티프레그드데드리프트와 브이스쿼트를 하고 힘을 빼고 왔다. 레그프레스로 남은 힘을 짜낸다. 첫 세트를 하고 나면 허벅지가 아프고, 두 번째 세트를 하고 나면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등판에 몸을 맡기게 된다. 방금 사우나를 하고 나온 듯 나른한 느낌으로 눈이 저절로 감긴다. 잠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에 빠졌다가 눈을 뜨면 개운한 느낌이 찾아온다. 사우나에 가는 건 싫어하는데 레그프레스에서 사우나 기분을 느끼는 건 좋다. 세 번째 세트에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에게 말했다. 저절로 명상이 되네요.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보다. 운동하면 생각이 없어져서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힘들게 운동하다 보면 운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중량을 다루는 운동이다 보니 자세에 집중하지 않으면 다치거나 근육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50분의 운동에도 기승전결의 흐름이 있다. 운동강도와 나의 한계가 절정에 달할 즘이 되면 다른 것은 다 사라지고 오직 무게와 나의 움직임만이 남는 순간이 온다. 생각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 소중했던 건 끊임없이 찾아오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돌고 도는 생각은 아버지 그리고 삶이었다. 떠난 아버지가 떠오르면 곧이어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고민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시간도 필요했다. 헬스장까지 차로 이동하는 10분 동안 울다가 헬스장에 가면 멀쩡히 운동하고 나와서 다시 집에 가는 길에 또 울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위에서 울고, 멀쩡히 아이를 맞이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때는 운동하는 시간이었다. 운동을 충분히 힘들게 하고 있는데 더 힘들게 하고 싶었고, 힘든 줄 몰랐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숙제처럼 반복되며 맴도는 생각들에 멈춰 있을수록 할 수 있는 것은 운동밖에는 없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성실하게 운동을 다녔고 아픈 발에도 불구하고 운동능력은 조금씩 꾸준히 늘어나는지 일주일에 두 번 가던 운동을 금방 세 번 가게 됐고, 개인 운동까지 하면 다섯 번, 어떨 땐 육일을 계속 가는 날도 생겼다. 나의 권유로 함께 운동을 다니게 된 친구 재인이는 날 보고 헬스 모범생이라고 했다. 헬스장에 가면 선생님에게 모범생 오늘도 왔다 갔냐고 묻기도 하며 모범생인 걸 공식적으로 인증해 주기도 했다. 우등생은 못돼도 모범생은 능력과 상관없이 될 수 있는 거였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훌륭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과 꾸준히 하는 사람이었다. 잘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능력만 가지고도 닿을 수 있는 영역이지만, 열심히 하는 것과 꾸준히 하는 것은 능력 밖의 영역이고 능력이 아닌 그것이 어쩌면 가장 큰 능력인 것 같았다. 성실함과 꾸준함을 내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배우고 있었다. 헬스라는 운동은 성실함과 꾸준함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운동이다. 동네헬스장이라는 뛰어난 접근성이 유리한 환경적 조건이다. 내가 가진 경계까지 밀어붙이면서 조금씩 그 한계를 넓혀가는 것, 점진적 과부하를 무게나 횟수라는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동기를 꾸준히 유지하기에 좋다. 한 달 만에 몸짱이 될 수는 없지만 수년쯤 계속하다 보면 크게 운동신경이 없어도 제법 밀도 높은 근육을 가지게 될 거라는 다소 보장된 미래가 기다리는 것도 운동을 이어가게 한다.

나와 운동만 있는 상태, 무아지경으로 운동하다 보면 몇 개, 몇 세트를 했는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고 하니 선생님이 말했다. 저는 그럴 땐 그냥 한 세트 더 하면 된다고 해요. 더 해야 할 지 그만해야 할지 모를 땐 그냥 한 번 더하자고 생각하면 되나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땐 운동을 하자는 첫 번째 공식 이후로 두 번째 공식이 생겼다. 나는 내가 시작은 잘하고 끝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일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그냥 하고 한 번 더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의 약한 체력이 크게 작용했다. ‘한 번 더’와 ‘그냥’, 그리고 체력은 선순환 관계다. 한 번 더 덤벨을 들어 올리면 근력이 세져서 다음에 또 그냥, 한 번 더 할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연습할수록 잘하게 되고, 연습에는 체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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