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길을 포기하고 원수와 손을 잡다.
천하를 가르는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는 도쿠가와徳川家康 가문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를 가졌고, 서군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번, 죠슈번과 사츠마번은 대폭으로 영지가 삭감된 채 가장 가난한 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였다. 세키가하라 패배 이후 가장 몰락했던 두 번이, 250여년이 지난 막부말기 시점에는 가장 강력한 번으로 성장해있었다.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단 하나의 원인을 이야기하라면 그것은 서구와의 교역창이 남서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츠마와 죠슈는 지리적으로 가장 서쪽에 있어서, 서양의 기술과 교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쌓고 서양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두 웅번, 사츠마와 죠슈는 견원지간이었다. 그 이유는 두가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강제개항과 불평등조약은 일본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일본인들은 생각했다. 이 위기를 사츠마와 죠슈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두가지 정치사상, 즉, 존왕양이와 공무합체公武合體이었다. 존왕양이는 천황을 받들어 이 혼란의 일본을 강력히 하고 서양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주장이며 공무합체는 천황과 막부가 힘을 합쳐 혼란을 극복하자는 주장이었다. 이 두 사상은 일본의 정책방향이자, 동시에 두개의 정치세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존왕양이는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 공무합체는 막부를 지지하는 세력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죠슈는 존왕양이의 대표주자였고, 사츠마는 공무합체의 선두주자였다.
죠슈를 필두로한 존왕양이파는 천황의 칙서를 앞세워 본격적인 양이를 실시한다. 존왕양이파는 천황주변의 공경세력,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과 제휴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었다.
한편, 막부를 지지하는 공무합체파에서는 천황을 등에 업고 벌이는 존왕왕이파의 과격한 행보를 좌시하지 않았다. 마침내 공무합체파인 사츠마변과 아이즈번会津藩이 결탁하여 정국전환의 음모를 꾸민다.
13일 밤, 사츠마의 번사 다카사키 사타로가 아이즈번의 실세 아키즈키 데이지로에게 조용히 접근한다. 그리고 존왕양이파를 몰아낼 정변을 획책한다. 그 방식은 다소 쿠테타스러웠다.
18일 밤, 사츠마와 아이즈는 천황에게 접근하여 존왕양이파를 교토에서 몰아낼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한다. 이 때, 사츠마와 아이즈의 병력이 궁궐을 지키고(천황의 외부접견을 막고), 천황의 칙서가 나올 때까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새벽의 갑작스런 정치적 쿠테타에 존왕양이파가 놀란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이에 흥분한 죠슈번과 친위병들이 존왕양이의 공경인 산죠 사네토미의 집에 집결했다. 그러나, 그 사이 나온 천황의 새 칙서는 사츠마와 아이즈의 편을 들어주었다. 천황이 공무합체 지지를 선언함으로서 존왕양이파들의 권력기반(천황의 지지)은 사라졌다. 불과 그 전날 존왕양이를 지지했던 천황이 하루만에 변심에 크게 분노했지만, 결국 존양왕이파는 모두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8.18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이다. 이 때부터 죠슈사람들은 자신들을 몰아낸 사츠마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죠슈인들은 조리바닥에 '사츠마 도둑놈들薩摩賊' 이라는 글을 새겨서 신고 다녔다.
8.18 정변으로 세력을 잃은 존왕양이파들은 절치부심한다. 어떻게 하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까.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분주하던 어느날, 존왕양이 지사들이 교토의 이케다야池田屋라는 료칸에 머물고 있었다. 이케다야는 쓰시마対馬번저 바로 옆이자, 죠슈번저와 한블록 거리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존왕양이파들의 아지터였다.
이 비밀 아지터를 알아낸 막부를 지지하는 낭인무사세력인 신선조新選組(신센구미)가 이케다야를 급습한다. 어둠이 짙은 밤, 신선조의 사무라이들이 이케다야를 야습. 존왕양이파들을 베어버리는 피의 활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신선조가 세상에 화려하게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케다야의 유혈참극은 존왕양이파에겐 인내심의 한계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죠슈와 존왕양이 급진파는, 이제 단번에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동시에, 8.18 정변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막부세력이 지키고 있는 교토에서 천황을 빼와 존왕양이파의 품에 안기고, 존왕양이 정책을 밀어붙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들어가, 히로시마번広島藩까지만 데려올 수 있다면, 단숨에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마침내 죠슈번은 군대를 이끌고 상경한다.
죠슈번의 군대가 교토로 진격했다.
제1군은 우두머리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가 교토외곽 후시미伏見 방면에 주둔, 제2군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가 남서쪽 덴노우산天王山에 포진, 제3군은 기지마 마타베来島又兵衛 등이 교토의 서쪽 천룡사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천황의 어소御所*를 지키는 막부측 세력으로는, 교토수호직을 맡은 아이즈번会津藩, 정예 사츠마번, 오가키번大垣藩, 구와나번桑名藩, 에치젠번越前藩 등이 있었다. 특히 어소에는 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이누이문乾門에는 정예 사츠마번이, 하마구리고문蛤御門(금문禁門)에는 용맹한 아이즈번이, 사카이마치문堺町門에는 에치젠번이 수비를 맞았다.
마침내, 죠슈번은 3방향으로 진격했다.
남쪽 후시미에서 오던 제 1군은 진격도중 기습을 받아, 단번에 괴멸되었다. 그러나, 가장 맹렬하게 싸운 제3군인 기지마의 부대가 아이즈번이 수비하는 하마구리고몬 앞에 도착했다. 하마구리고몬에서 양번 사이의 격전이 벌어졌다. 교전 와중에 죠슈번은 아이즈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대포를 발사하였다. 어쇼를 방어하는 아이즈번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이지만, 이것은 어쇼, 즉 천황이 거주하는 곳을 향하여 대포가 발사된 것이었다. 이 때 시가전으로 교토의 절반 이상이 화재로 불에 탔다고 한다. 아무튼 용감한 급진주의 죠슈번과 충직한 보수주의 아이즈번이 하마구리고몬 앞에서 팽팽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갑자기 일군의 정예병이 나타나 죠슈세를 유린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죠슈번은 이 새로운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아이즈 역시 세련된 무기로 등장하여 적들을 궤멸시키는 아군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바로 강자 사츠마였다.
"또 사츠마라니!" 죠슈는 또다시 사츠마에 이를 갈았다.
이누이문을 지키고 있던 사츠마는 인근 하마구리고몬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지원하러 온 것이었다.
이렇게 죠슈는 패퇴했고, 쇼가촌숙松下村塾의 3대 인재 중 하나인 쿠사카 겐즈이도 이 때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죠슈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천황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감히 어소를 향해 대포를 쏘다니!!"
막부 후견직 요시노부德川慶喜는 허수아비 쇼군과 천황을 종용해 죠슈를 정벌하기로 지시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차 죠슈정벌이 시작되었다. 막부의 군대가 죠슈번을 압박해오자, 죠슈번은 공포에 휩싸였다. 죠슈번 내부의 보수파들은, 존왕양이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이 번을 위기로 몰어넣었다고 주장하며 죠슈의 생존을 위해, 죠슈번 내 존왕양이파 주요 참모의 목을 바쳤다. 3 가로家老에게 할복을 명하고, 4 참모를 처형했다. 8.18정변 때, 죠슈로 쫓겨난 5인의 존왕양이파 공경들을 막부에 인도하며, 화의를 구걸했다. 이 때의 존왕양이파들은 구속되거나 잠적했으며,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역시 긴급히 큐슈로 도피하여 숨어살았다.
(3편에 계속)
1편:https://brunch.co.kr/@goldsmiths/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