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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Nov 12. 2019

살다 보면...ㅎㅎ 비겁함도 필요해.

내 남자 이야기(29)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당시에는 황당하고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일.. 그런 일 한 번쯤은 다 있을 것 같습니다.)


회사 합병 이후 나는 도매 위주로 전국을 돌며 영업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냉동탑차에 물건을 싣고 배송을 하고 수금도 하기 위해 운송기사와 함께 돌아다녔다. 두 살 위인 임 과장은 비쩍 마른 체구였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 내는 사람이었다. 비록 합병한 회사에서 감시 목적으로 나의 하루 일과를 보고하기 위해 붙여준 사람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보이지 않게 마음을 써주며 도와주었다.


하루는 예정에 없던 부산 출장을 가게 되었다. 새벽에 공장을 돌며 막 출고된 제품을 싣고 서너 군데나 되는 도시를 돌아 부산으로 가야 하는 고된 출장길이었다. 요즘처럼 밟는 대로 속도가 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속력이 90~100km가 고작이었던 점보 타이탄 냉동탑차는 그나마도 영하 15도 이하로 냉동기를 켜 놓아야 하기 때문에 속도는 70km도 겨우 달릴 수 있었다. 왕복 18시간... 생각만 해도 피로가 몰려왔다.


갑작스러운 배송 일정으로 임기사는 중요한 개인 스캐쥴이 어그러져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나와도 말다툼이 생겨 말없이 운전하는 임기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작대교를 지나고 사당역을 지나 남태령고개를 넘어가는 길. 지금도 그 길은 정체가 심한 구간이지만 유난히 길이 막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진을 빼놓았다. 그리고 내리막 길에 접어들면서 슬슬 속도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이 길만 빠져나가면 부산까지 계속 달릴 수 있다. 그런데 막 속도를 내려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흰색 대우 프린스 승용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았다. 끼이익~!!! 가뜩이나 성능도 좋지 않은 데다 물건이 가득 실려있는 냉동탑차는 제동거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어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급정거를 하게 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열이 받아 순간적으로 쌍욕을 해댔다.


"아! 씨발!! 운전을 발로 하나!!  초보 딱지를 붙이고 다니던가!! 아님 끝 차선으로 가던가 해야지! 이 바쁜 시간에 왜 차는 끌고 나와서 헤매고 지랄이야!! "


임시 번호판을 단 차량은 이후로도 계속 달리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급정거로 뒤차들의 운전을 방해해 거리는 일대 소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성질 급한 운전자들은 흰색 차량의 차선을 피해 다른 차선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차량들이 얽히고설켜 도로는 크락션 소리와 비뚤빼뚤한 차들로 나장판이 되었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서 임기사도 크락션을 계속 울려댔다.


빵~~~~ 빵빵빵~~~

"저 또라이 쉐키..뭐야!!"


임기사는 나에 대한 화풀이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유난스럽게 화를 내며 거칠게 운전을 했다. 그때 왠지 나도 동조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욕을 하며 오른발을 다 보이도록 운전대 높이까지 들어 허공을 차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임기사는 자신을 동조해 주는 내 시늉에 마음이 풀렸는지 재미있다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앞을 달리던 바로 그 승용차가 갑자기 차를 도로 한복판에 세웠다. 그 바람에 끼익~ !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의 차에 닿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급정거를 하게 됐고 뒤를 따라오던 차들도 연이어 급정거를 하게 됐다. 뒤에서 연달아 들리는 거친 항의와 욕설들이 고스란히 귓가에 들렸다. 우리도 그 입김에 힘입어 연신 욕설을 쏟아냈다.


" 이 미친 쉐키야!! 운전 똑바로 안 해!!"


그렇게 거친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 승용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순간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기어 나온다는 표현을 쓴 것이 처음이었다. 운전자의 체구는 거인과 같았다. 그가 차에서 기어 나오는데도 한참 걸리는 듯했다. 그리고 똑바로 섰을 때는 2.5톤 타이탄 트럭의 조수석에 앉은 나의 눈과 거의 일직선이 될 정도록 키가 컸다. 하얀 옷에 백구두. 그리고 빡빡 깎은 머리. 손목까지 이어진 검은 문신이 드러났다. 그는 한눈에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그렇게 뒤에서 크락션을 눌러대며 큰소리를 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정적이 잠시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몇 발짝 안돼서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내게로 걸어왔다. 그때 정차된 앞 차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조그마한 여자가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오빠야~! 대충하고 오래이~"



마침 갑작스러운 차들의 소란에 교통을 통제하던 경찰이 뛰어오는 것을 봤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남자의 모습을 보더니 방향을 틀어 다시 되돌아 갔다.


'아~!! 이제 죽는구나...'


"임과장! 저... 저 사람 오는데.."


임기사는 갑자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뻑뻑~ 담배 연기만 몰아 내쉬었다. 대꾸도 없다. 나는 순간 조수석 차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창문을 급하게 올렸다. 그리고 조수석 앞 유리창까지 올렸던 오른발을 얌전히 바닥으로 내리고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았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먼 산 쪽으로 향했다. 어쨌든 그 남자와 시선을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쿵! 쿵! 쿵!

그의 거대한 주먹으로 조수석 창문을 내리쳤다.


"야! 내리바!! 너 지금 누구한테 욕한거야... 어이!! 창문 내리바 임마! 안 내려!! 빨리 창문 내리라!! 뽀사뿌기 전에~!"


그의 한 주먹이면 나는 멱살을 잡힌 채로 장난감처럼 휘둘릴지도 모른다.


"저...왜 그러시는데요..."

창문을 겨우 눈높이까지만 내리고 나온 나의 한마디였다.


"야~임마!! 너 아까 발로 차는 시늉한 거 누구한테 한 거야! 나한테 한 거 맞지!!"


'아~ 그게 거기서 다 보였던가...'

내 머릿속은 어찌할 바를 몰라 새하얘졌다. 임기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반대편 창을 응시하면서 담배만 빨아댈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아. 아닌데요..."

"뭐가 아니야 임마!! 너 내리바! 빨리 내리!!"


그는 양 팔로 차를 잡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짐이 가득 실린 탑차가 앞뒤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내야 했다.


"저, 사장님... 아까 그 발차기는 사장님한테 한 게 아니고 그... 앞차한테 한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자 옆 조수석의 여자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오빠야~ 바라~ 오빠한테 맥인 게 아니다니까~ 빨랑가자~ 갱찰 본다이가!"

"야 ~ 임마~ 운전 똑바로 하래이~ 우따대고 욕지거리고~ 그라고 다리 잘못 쓰면 병신된다! 알긋나! 조심하그라~!"



 우쒸... 어따대고 자꾸 반말인지...

그러면서도 이런 개쪽팔림이라니...


그렇게 시작된 부산행 출장은 왕복 18시간 동안 말도 없이 마무리했다. 평소 들리던 휴게소도 그냥 지나쳤고 도착 후 한 잔 했던 소주도 그날은 비워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가끔  그 남자 앞에 한없이 작아지며 비겁해졌던 나를 떠올리며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지나간 추억이라 술안주를 대신해 이야깃거리를 꺼내기도 한다. 살다보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낄때 살고자하는 용기에서 나오는 비겁함도 이렇게 추억이 되어간다.


"임과장! 잘 살고 있지? 혹시 담배만 빨아대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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