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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Dec 28. 2019

갚지 못한 빚

내 남자 이야기(45)

구멍가게 수준이었지만 냉동식품 사업을 시작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사업은 확장되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만으로는 배달 물량을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냉동탑차도 필요했고 타 지역에 떨어져 있는 담당자들과 미팅을 위해서는 당장 승용차가 시급했다.


그러나 당시 형편에서는 어떤 것도 호락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캐피탈 금융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라 자금 융통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내 신용은 평점이 좋지 못해 대출은 엄두도 못 냈다. 결국 현금만이 답이었지만 그럴만한 목돈도 없었다.


나는 군대에서 공관에 배치된 포니엑셀 승용차로 서행 주행을 하면서 2종 보통면허를 땄다. 당시에는 시내 주행 제도가 없었던 때라 면허증만 딴 경우로 한 번도 정식으로 운전을 해 보지 못한 왕초보에 해당한다.


그러나 필요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고 했던가. 나는 승용차가 필요했고 어떻게 해서든 구해야 했다. 냉동탑차는 아무래도 운전 미숙인 나에게는 무리라는 생각에 승용차로 선택의 폭을 좁혔다. 그리고 제일 싸고 튼튼한 프라이드 3 도어. 뒷 좌석의 시트를 접으면 짐칸으로 사용해도 좋아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가격은 430만 원에 취등록세 별도.


'아... 결제를 미루고 유용할 수 있는 금액이 150만 원인데 나머지 300만 원을 어디서 마련하지?'


나는 고민 끝에 아버지를 생각했다. 몇 개월 전에 정년 퇴임하신 아버지는 요즘 아파트 경비 자리를 알아보신다고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고 계셨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아버지와 단골 포장마차에서 약속을 잡았다.


난생처음으로 마주 앉은 아버지와의 독대 그리고 술잔. 어색한 기운이 우리 두 사람을 감돌았다. 처음이라는 것도 낯설은데 무언가 부탁하려니 더 말이 없어졌다. 간간히 내쉬는 나의 한숨소리만 들숙날숙 자리를 잃고 오갈 데 없이 들락거렸다.


"삼촌! 아버지랑 내외지간 하는 거야! 어째 두 양반이 똑같이 한마디도 안 하고 술만 마셔~?"

포장마차 주인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아빠랑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무지하게 어색하네요. ㅎㅎ"

그 사이 아버지가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먼저 한 마디 건네셨다.

"뭐... 할 말 있니? 갑자기 불러 놓고 얘기가 없어?"

"... 그냥... 소주 한 잔 하자구요..."

"너... 일하는 거. 힘 안 드냐? 니 엄마 말 들으니 여기저기서 취직할 생각 없냐고 전화가 많이 온다던데 그만 정리하고 남들처럼 직장 다니지 그러냐..."

"네... 그냥 계속해 볼래요. 성격이 못돼서 그런지 남들이 시키는 건 하기 싫어서요.."


...... 침묵....


"아빠. 요즘 많이 바쁘세요?"

"왜, 안 바쁘면 니 사무실에 나가서 배달이라도 해 주리?"

"아니. 배달은 제가 해도 되는데요. 일손이 부족한 게 아니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아버지 쌈짓돈이나 탐내는 망나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소주 한 잔 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술 마신 지도 오래됐는데도 아빠랑 둘이 마셔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구요. 이제는 가끔이라도 둘이 한 잔씩 마셔요."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너. 언제까지 오토바이 타고 다닐래? 니 엄마가 말은 안 해도 걱정 많이 한다. "

"걱정 마세요. 배달하려면 이동수단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도 죽을 만큼 큰 사고는 안 났잖아요. "

.......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침묵 사이로 간간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빈 소주병이 두 병이 되었다.

'아... 그만 집에 가야겠다. 나도 아빠도 참 재미없는 사람이구나'


"차 한 번 알아봐라. 운전은 할 줄 알지?"

"네?"

"사고 나도 오토바이보다는 차가 안전할 거 아니냐. 큰 차는 아니라도 조그만 차로 한 번 알아봐. 많이 비싸지 않은 걸로. "

"아. 네.. 그럼.. 300만 원만 도와주세요."


이런 상황이 전개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마치 연습이라도 해 둔 것처럼 다시 그 자리에 앉아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긴 설명을 이어갔다.


"니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라"

"네~!!"
"아빠가 배운 게 없어놔서 뼈 빠지게 한 직장에서만 20년이 넘게 일하고 정년퇴직했는데도 그 퇴직금이라는 게 고작 돈 천만 원도 안되더구나. 월급도 박봉이었는데... 니 엄마한테 얼마나 미안하던지.

둘째 너한테도 아빠가 해 준 게 너무 없어서 이렇게라도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특히 너는 공부한다는데 돈도 못 대주고... 거기다 직장 안 다니고 장사한다고 뛰어다니는 게... 다.. 이 아빠 탓인 것 같아서 미안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죄송하죠. 공부도 남들 하는 만큼은 다 했는데요. 뭘. 간판이 뭐가 중요해요. 졸업만 하면 되지. 도와주신 돈으로 차 사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꼭 이자까지 합해서 돌려 드릴게요. 금방은 아니어도 몇 년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아빠는 취한 것 같으니 먼저 집에 간다. 조금만 먹고 일찍 들어와라."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몇 마디 나누시고는 급하게 집으로 향해 가시는 아버지를..... 가로등 불빛 아래로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는 그때 당신을 보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돌아서는 순간, 당신의 눈가에 스르륵 흐르는 눈물을.... 그리고 저를 등지고 먼 길까지 가서야 손으로 닦아내시던 모습을... 다 큰 자식이지만 아직은 보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연약한 모습을 감추시는 그 강인함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시간 그 자리가 그립습니다. 조금 더 그 시간을 붙잡을 걸 그랬어요. 몇 년 뒤, 아버지와 난, 환자와 보호자가 되었고 내 생애 첫 차를 사 주신 아버지의 퇴직금은 이제 영영 갚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가끔씩 차를 닦아 주시던 아버지의 밝은 모습도 이제는 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습니다. 이렇게라도 당신을 가슴 한 편에서 불러내어 못다 한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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