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돌아보면 한참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볼라치면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발끝만 내려보며 걸어온 게 오래 전부터였다.
다리는 생각보다 둔하고 목적지는 까마득히 먼데 묵직한 짐이 어깨위로 툭- 하니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짐은 내 몫이었고 나는 걸어야만 했으므로 떨치지도 멈추지도 못하였다.
가끔은 그대로 주저 앉아 쉬어 가고 싶었다. 기약없이 엎어져 길고 긴 울음을 울고픈 날도 있었다. 아니, 아예 모두 그만둬도 될 일이었다. 갈증은 늘 마셔선 안 될 물가를 맴돌았다.
한우리호 4데크 변소 마지막칸은 그럴 때 찾는 곳이었다. 화장실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창이 난, 배에서 유일하게 홀로일 수 있는 그곳에서 나는 잠자코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배는 언제나 같은 속도로 나아갔고 보이는 풍경은 하늘과 바다 두 가지 뿐이었다. 단순한 것과 꾸준한 것이 위안이 됨을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많이 생각했다. 가끔은 격렬한 토론과 드잡이질도 있었다. 그때마다 늘 한 쪽의 힘이 셌다. 조금 더 걷자는 쪽이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배우고 익히는 덴 자신이 있다고 자부한 날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 하나는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목소리 높인 적도 있었다. 변기 물을 내릴 때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되짚었다. 후회가 많은 날엔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레버를 내렸다. 그때마다 물은 변기 안쪽을 세차게 쓸었다.
시간은 늘 한 방향으로 흐르므로 언제고 오늘이 오리란 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주 완곡하고 종종 휘몰아치는 시간의 변덕이 감각을 흐리게 했으므로, 나는 오늘이 오늘에 올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 한시간 한나절은 지리하게 기어가면서도 한달 반년은 성큼성큼 지나가는 꼴이 못내 서운했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치며 "이봐 여기가 정상이야"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렇게 나는 지난 9개월의 끝과 마주했다. 과연 여기는 정상, 길고 길 산행의 첫번째 봉우리며 그토록 닿기를 소원한 곳이다. 나는 이제 실습항해사로 상선에 승선할 자격을 얻었다.
아직도 나를 둘러싼 상황은 엉망진창이지만 몇달 전과는 비할 수 없이 안정된 상태다. 과거는 돌릴 수 없고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인데 나를 둘러싼 고민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거나 아직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으니 당장 급할 일은 없다.
현재만을 놓고 보자면 만사 오케이다. 올해 안에 나는 그토록 소원하던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갈 것이다. 지불한 값은 예상보다 크고 미래 역시 불안하지만 어찌됐든 배는 타게 되었다. 사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