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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Sep 29. 2023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오마이뉴스 게재, <황홀한 글감옥>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54] 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


문학 좋아하는 이들끼리 모여 세계의 대하소설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하룻밤을 새우는 것도 금방이다. 격동의 역사 속에 휩쓸린 인간과 가문의 이야기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큰 공감을 자아내는 탓이다.


대하소설이라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제법 많다. 칠레의 굴곡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부터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이야기를 그린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짧은 분량에도 대하소설의 멋을 담아낸 위화의 <인생>, 펄벅의 <대지> 같은 작품들이 먼저 생각난다. 그 뒤로 또 많은 작품들이 얼굴을 들이미는데 대하소설이란 정말이지 각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것이다.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치열했던 이념갈등과 동족상잔의 비극, 독재와 민주화운동, 끝없는 경제개발의 수레바퀴를 겪은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는 특별히 대하소설과 잘 어울리는 면이 있다. 한 인간의 삶이 역사와 맞물려 강처럼 유구히 흘러가는 인상을 남기는 대하소설이란 역사적 사건이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맞이하는 역사적 굴곡이 수차례씩은 될 것이기에 그걸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써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선 유독 많은 대하소설이 태어났다. 박경리의 역작 <토지>와 최명희의 <혼불>, 홍명희의 <임꺽정> 같이 분량까지 장대한 대하소설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로부터 또 많은 작품이 태어났으나 대다수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대하소설을 꼽으라 하면 대개 이 작가의 작품 몇이 수위를 다툴 것이다. 조정래다.

             

▲  책 표지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한반도 대하소설의 정수, 어떻게 태어났나


소설가 조정래는 한반도 사상 최고의 대하소설을 써낸 작가다. 그가 써낸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이념갈등과 일제강점기의 수탈,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현대사 가운데 살아간 개인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짚어낸 역작들이다. 특히 <태백산맥>을 집필하면서는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작가 스스로 국가의 야만적 폭력 앞에 놓이기도 했다.


무려 32권에 이르는 대하소설 3부작을 집필하는 동안 준비과정을 포함해 총 20년의 시간이 들었다. 그 기간을 바쳐 세 편의 소설을 내어놓는단 건 한 작가의 삶을 가로지르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웬만한 마음으로는 이를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쓰기가 단순한 소설쓰기에 그칠 수만은 없다. 소명인 것이다.


젊은이가 묻고 거장이 답한다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적지 않을 터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 작품들에 다가섰나, 어떻게 그 작품이 가져온 파도와 마주했나, 그것이 그를 어디로 이끌었나, 그와 같은 질문들이 마음속에 맴돌 것이다. 그런 이가 나 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책 <황홀한 글감옥>이 나오게 된 걸 보면 말이다.


<황홀한 글감옥>은 조정래의 첫 에세이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에세이만은 아니다. 책은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읽은 대학생 등 젊은이 250명에게 조정래에게 궁금했던 질문을 받고, 작가가 추려진 84개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글 형식으로 꾸려졌다. 독자의 물음에 답하는 편지라고는 하지만 각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조정래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시절, 작가로서의 삶과 결혼생활까지가 고스란히 묻어나 일생의 에세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가볍게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물음부터 소설 창작에 관한 궁금증, 제법 민감할 수 있는 정치적 사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이에 대해 작가는 성실하면서도 완고한 자세로 솔직하게 답변해나간다.


한 학생이 작가가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글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에 대해 조정래는 이렇게 답한다.


"모든 비인간적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짊어지고 정부 권력에 도전했던 것은 작품과 함께 행동으로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본보기였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진보적인 작가의 길은 조금은 성직자의 길이기도 하고, 조금은 철학자의 길이기도 하고, 조금은 개혁자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편할 리 없지만 보람 있고, 작품으로 감동적인 형상화를 이루어내면 독자의 박수갈채 속에서 그 생명을 오래 보장 받게 될 것입니다. 문학은 종교와 철학과 과학과 다른 그 무엇일 것입니다.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5~36 페이지)


작가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지는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을 써낸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문학을 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진실을 추구하며 나름의 결정을 빚은 대가가 제 문학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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