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안 마셔, 가 그렇게 보내놓고 몇잔쯤 더 마시는 날엔 필시 필름이 끊기고 만다. 그러고 일어나면 맨 정신으론 절대 걸지 않을 전화를 여러 통 걸었다거나 때로는 통화까지 했다거나 말끔히 설거지며 방청소가 되어 있거나 맞춤법이며 띄어쓰기가 엉망인 글따위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개중 마지막 것을 나는 무척 반가워하는데, 평소라면 좀처럼 떠올리지 않던 기억을 끄집어내 가지 않을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가고 미처 알지 못한 깊은 감정들을 이끌게 되는 덕이다. 이런 건 조금만 손을 보면 제법 읽음직한 글이 되곤 하여서 나는 마치 흥미가 동하는 녀석을 대하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다루고는 한다. 말하자면 술이 내게 주는 효용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거다. 뿐인가. 잔뜩 취하여 완전히 깨지 않은 채로 일어난 다음 날이면 비틀대며 걸어가 선 화장실 거울 안에 틀림없이 무척 잘 생긴 녀석이 들어가 있는 것이어서 잘 찍지 않는 사진을 제법 남겨두기도 한다. 요컨대 일년 중 취한 날만큼 나의 자신감이며 자존감이 상승한다고 할 것이다. 또 뭐가 있을까를 곰곰이 고민하며 나는 술마시는 일의 이로움을 따져보는 것인데, 술을 마실 때면 들끓던 분노도 잠잠해지고 갉아먹는 우울이며 가라앉는 슬픔 따위도 적당히 상대할만은 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지만 술도 조금만 사주면서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이들이 파리처럼 달라붙는 통에 도망쳐서 혼자 마시고는 하는 게 탐탁찮을 뿐이다.
2023. 2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