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K Dec 14. 2019

10 제품디자인팀 신입이 되다

제품 디자인 취업 도전기 10 [합격] 마지막

 최종 합격을 몇 달 전에 하는 바람에 이 도전기를 다 적지 못한 채로 바쁜 날들을 보내왔었다. 첫 편을 쓸 때에는 오기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어디든 될 때까지 이 글들을 다 쓰려했었다. 마지막 편을 쓸 때 어떤 내용을 적게 될지도 궁금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인하우스 제품 디자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디자이너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기에는 갈길이 멀다. 회사에서는 아직 막내이고 써먹을 것들보다 배울 것이 더 많다. 생각보다 회사에서 디자이너에게 트레이닝을 철저히 해주는 것 같다. 어쨌든 그간 긴 취업기간을 마무리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 적어보려 한다.


1. 제품 디자인을 끝까지 고집한 게 정말 다행이다

 제품 디자인이 전망이 더 좋기 때문에, 혹은 제품 디자인이 더 돈을 잘 벌기 때문에 다행인 게 아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고집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누군가의 말에 휩쓸리고, 소문에 휩쓸리고, 선배와 어른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설계한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 경력을 이어나갈 때에도 이러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일들이 내 삶에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은 정말 좋은 모티베이션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를 위해 달려온 지난 2년 반 정도가 너무나 지옥 같았긴 하다. 그런데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 사실 대부분 디자인과, 특히 제품 디자인과 졸업생들은 취업자리가 없어 타협을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걸 하겠다'라고 많이들 말한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기준도 없고, 현실에 대한 정의도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소위 현실적인 선택지를 택한다고 해서 더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고, 더 잘살게 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현실적인'이라는 말 자체가 비현실적인 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디자인 업계가 힘들기 때문에'라는 말은 도망치는 말인 것 같다. 디자인 취업이 힘든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 이에 대해서 확신이 있다면 계속 끝까지 가보는 게 좋은 것 같다. 확신이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여서 다른 길을 간다면 그 다른 길이 내가 확신이 있는 또 다른 길이 정말 맞는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어차피 그 다른 길도 힘든 길이다. 지금 취업이 쉬운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던 것들 다 던지고 그것만 해오던 사람들이 경쟁하는 곳에 뛰어드는 것은 디자인 취업만큼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VMD/패키지 디자인과 같이 제품 디자인이 아닌 직무로 가지 않게 된 것도 다행이었다. 그 직무들은 내가 해본 적도 없고, 그쪽으로 공고는 많이 뜨지만 나는 그런 직무 쪽으로 평소에 관심이 없었다. 그 분야 공고들에서 찾을 수 있는 나와의 공통점은 '제품 디자인과 출신'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공고가 제법 있어서 그쪽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지원해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 했었다. 그렇게 해서 그 직무로 갔다면, 직무만족도가 엄청 떨어졌을 것 같다. 채용공고에 내 경력이 바뀌는 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닌 것 같다.


2. 국내 인하우스 취업을 끝까지 고집한 게 정말 다행이다

 유학을 갈까 그 이후에 해외 스튜디오에 지원해볼까, 스튜디오로 갈까. 이 세 가지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다 도피처였던 것 같다. 스튜디오로 갔다면 그래도 나름 만족했을 수는 있겠지만, 유학은 정말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유학을 가고자 했던 이유부터가 틀렸었다. [ 한국은 디자이너가 살아남기 힘드니까, 한국에서 디자인 하기 진짜 짜증 난다 ] 외국이라고 다를까? 외국도 한국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그곳에 살아본 적도 없고, 살아봤다고 하는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단지 외국에서의 디자인업계가 한국과 다르다는 보장도 없고, 외국에서 디자인 대우가 좋다고는 하지만, 유학생 디자이너도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냥 글로, 책으로 더 좋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한국인 디자이너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다 말하기 이전에 내 실력 자체가 디자인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실력이었다. 그 점을 간과하고, 환경 탓을 한 것이기에 유학이라는 선택지를 택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이건 내 경우이다. 물론 어떤 이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외국에서 오래 살아본 적이 없었으며, 해봤자 한 두 달씩 여행으로 겪은 게 전부이다. 게다가 가족, 친인척, 친구 모두 토종 한국인이다. 그냥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기에 한국에서 살아남는 디자이너가 되는 게 해외에서 새로운 개척을 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크게는 유학을 가도 내 성향상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텐데, 그때 한국에서의 경력이 없다면 좀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리스크를 떠안기에 금전적 리스크가 너무 크다)

  스튜디오의 경우는 사실은 연봉 때문에 고민이 컸다. 월세살이를 하는데, 3000 이하의 연봉은 아무리 일을 사랑해도 힘들 것 같았다. 그렇기에 스튜디오에서 경력을 쌓은 후에 괜찮은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이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그냥 인하우스 디자이너 취직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국내 대학원 또한, 갈 곳이 없어 간다는 식으로 가게 되면 시간낭비 일 것 같았다. 대학원이란 '이런 점이 필요하고 이런 점을 더 채워야지'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딱히 그 '이런 점'을 알만큼 디자인을 모른다. 제대로 된 실무를 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 순간 디자인만 생각하며 사는 삶도 딱히 아니었다. 그렇기에 목표 없는 대학원 생활은 내게 의미가 없어 보였다.

 스타트업 디자이너도 경력을 계속 이어나가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UX/UI 디자이너였다면 무게를 많이 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제품 디자이너로서 스타트업에 가면 그들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는 데 뭔가를 이끌어 갈 만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조 생산과정 자체를 아예 모른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컸다.) 게다가 포트폴리오가 많이 쌓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3. 그냥 다행이다

 뭐 이제는 내가 브런치에 적어온 이 글들이 취업 합격 수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된 글들이 되어 버렸다.  보통 그런 합격 수기에는 합격 노하우 같은 게 적혀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합격 노하우랄 게 딱히 없다. 그냥 합격한 게 다행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도 떨어졌을 수 있는 자리다. 내가 누군가보다 어떤 점을 잘해서라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는다. 어떤 점을 알려드릴게요 할만한 부분도 없다. 모든 제품 디자인 취업준비생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겼었고, 마찬가지의 학교 커리큘럼이었다. 그냥 졸전 하라 해서 했고, 했더니 갈 곳이 없었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계약직을 해봤고 포트폴리오 거리가 되려나 싶어 종종 스타트업에 외주도 받고 그래 왔다. 자소서가 문제인가 싶어 취업상담도 받고, 포트폴리오가 문제인가 싶어 학원도 다녀봤다. 면접을 못 보나 싶어 모의면접에 면접 스터디도 해봤다. 그리고 모두들 이런 일들을 한다. 그렇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를 만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끝인 것도 아니다. 그 자리에서 또 어떤 경력을 쌓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그냥 이 '합격'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겪는 단계에서 한걸음 겨우 뗐다는 뜻일 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한걸음은 반드시 어느 회사의 합격 통지서가 아닐 수도 있다.


--------------------------------------------------

사실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주거나, 뭘 가르칠만한 사람은 아니다. 회사일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제품 디자인 쪽으로 계속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럼에도 취업이 잘 안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이런저런 얘기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들어주는 쪽으로) 곧 다음 상반기를 앞두고 너무 걱정이 커서 걱정을 털어놓고 싶거나, 푸념을 하고 싶거나, 첫 취준이라 답답하다거나 할 수 있다. 이럴 때는 그냥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한번 카카오톡 1:1 오픈 채팅방을 열어놔 봤다. https://open.kakao.com/o/sWM9CYOb (참여 코드는 9876이다. 답이 느릴 수도 있다.)  나도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뭔가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어서 생각해봤다. 그리고 뭔가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글을 읽어주는 분들에게 고맙기도 해서이다.

 취업준비를 마무리하면서 이제는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 할지 실제로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1편부터 너무 징징대기만 했던 것 같다. 1편을 쓸 때와 다른 느낌을 갖게 된 부분들도 있다. 이렇게 계속 발전해가고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