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_#18. 내향인의 삶

둘은 좋지만 셋은 버거운, 어느 내향인의 에너지 운용 지침서

by 골골


나의 사용 설명서 첫 페이지, 첫 줄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충전 중에는 절대로 건드리지 마시오.’


내게 하루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정교한 배터리 소모전이다. 외출을 위해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게이지는 이미 깎이기 시작하고, 사람이 모인 곳에 발을 들이면 방전 속도는 가속 페달을 밟은 듯 빨라진다. 그래서 나는 늘 도심의 가장자리를 배회한다. 지하철이나 식당에 들어서면 본능적으로 구석 자리를 찾고, 출입구를 등진 채 벽을 마주하고 앉는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다만, 한꺼번에 좋아하지 못하고 '나눠서' 좋아할 뿐이다. 나의 에너지 분배에는 명확한 한계치가 있어서, 다대다의 왁자지껄한 모임보다는 일대일의 깊은 대화를 선호한다. 둘은 따스하지만 셋은 벌써 버겁다. 시끄러운 술자리보다는 고요한 찻집에서 상대의 눈을 마주하며 나누는 밀도 높은 이야기가 좋다. 물론, 그 깊은 대화조차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다.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면 다시 나만의 동굴로 돌아가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오늘의 '모드'를 결정하곤 한다. 현관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은 밝은 사람 모드로 갈까, 아니면 리액션이 좋은 관찰자 모드로 갈까." 메뉴를 고르듯 사회적 가면을 골라 쓰고 밖으로 나가지만, 그 가면 뒤에서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조용한 나를 지켜낸다. 말이 없는 날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그저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느라 밖으로 내뱉을 에너지를 잠시 아껴두고 있을 뿐이다.


약속이 잡히면 나는 두 번 피곤해진다. 약속 전날엔 다가올 소모를 걱정하며 미리 피곤하고, 약속 후엔 탕진해 버린 에너지를 복구하느라 또 피곤하다. 카톡 답장이 늦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답장을 보낼 마음의 배터리조차 남지 않아 잠시 '시스템 종료' 상태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나를 보며 심심하지 않냐고 묻지만,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빽빽하게 차 있는 시간'이다. 밖으로 흩어졌던 마음의 파편들을 수거하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잠시 구겨두었던 나만의 취향을 다시 빳빳하게 다림질하는 시간. 이 고독의 밀도가 충분히 확보되어야 나는 비로소 다시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얻는다.


나는 집을 사랑하지만 세상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먼 거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걸 즐길 뿐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뜨겁게 타오르는 엔진도 필요하겠지만, 그 열기를 식혀줄 차가운 냉각수나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작은 나사못 하나도 분명 필요하다.


나는 기꺼이 후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조금 느리고 존재감은 희미할지라도, 나만의 속도로 굴러가는 단단한 삶. 오늘도 나는 충전기를 꽂은 채 나만의 섬에서 평온을 만끽한다. 내일 다시 세상이라는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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