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소유 Aug 04. 2024

회사라는 곳이 일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은 아니야.

여긴 학교가 아니야.

“철수 선배, 아침 회의 끝나고 나 좀 봐요.”

탁용칠 사원의 갈굼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욕설로 답할 뻔했다. 대인배가 소인배가 되는 건 순간이다. 뻔하다. 쓸데없는 것으로 트집 잡아서 선배를 면박 주려는 것이다. 그나마 선배의 자존심은 지켜주려고 하는 것인지 따로 보자고 하는 그의 배려가 가상하다. 탁용칠과 탁용팔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사실 탁용칠은 나와 둘이 보자고 한 뉘앙스였지만 옆에 있던 탁용팔이 따라 들어왔다. 친형처럼 따르는 모습이다. 탁용팔은 거의 탁용칠의 꼬붕으로 보여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선배 어제 분석 맡긴 거 결과 나왔는데 x-cut 했어요? 잘 모르면 물어보고 했어야죠. 그렇게 막 분석하시면 어떻게 해요? 어휴 답답하네! 정말.”

탁용칠은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분을 삭이려고 하는지 손바닥으로 본인 책상을 쳤다.

“에? 또 왜 그래요? 형이 참아요. 선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잘 몰라서 막 한 거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죠.”

탁용팔이 탁용칠을 진정시켰다. 이 순간 난 자존심을 땅바닥으로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갓 3년 차가 된 후배들의 텃세가 우습다. 거기에 내가 꼴에 선배라고 정색해 버려서 무엇이 좋을까 싶다. 자존심을 내리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아 씨발 내가 정말 잘못했네. 내가 병신 새끼인가 봐. 난 그게 그만 씨부럴 x-cut인 줄 알았지 뭐야. 그래서 묻지도 않고 병신같이 의뢰했지 뭐야.”

난 그들에게 이렇게 한번 대답해 봤다. 그래도 그냥 약하게 자존심을 내리기에는 억울한 점이 있어서 강하게 내렸다.

“에? 선배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음부터 확인하고 진행하시면 될 것 같아요.”

탁용팔이 놀라서 내게 말했다.

“봐줄게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탁용칠도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마무리를 하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선배! 보기보다 한 성격 하시나 봐요. 그래도 너무 용칠 형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마세요. 저 형 고등학교 다닐 때 유도부 출신이었어요. 누구든 던져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다른 팀 동기를 들어서 땅으로 내리꽂았어요.”

얘기를 듣고 흠칫했지만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놀랄 내가 아니다. 난 자리로 가서 메일과 메신저 확인을 했다.


멀리서 장도영 사원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침 회의 시간에 내 얘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렸으리라. 그러더니 살금살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키가 150 정도밖에 안 되기에 서 있는 그녀와 앉아있는 나와 눈높이가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녀의 매력은 눈빛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와 같은 눈망울과 애교를 갖고 있어서 누구든 그녀의 애교에는 잘 넘어간다. 머리카락 또한 등까지 내려오도록 길러서 청순한 귀여움을 만들고 있다. 아무래도 그녀의 작은 키를 머리카락 길이로 극복하려는 모습이다.

“철수 선배님, 그래도 통합되어서 이제 같은 팀원인데 같이 커피 한잔하실래요?”

거절은 거절한다. 여자 후배의 커피 제안은 언제나 승낙한다. 막상 휴게실로 가보니 장도영 사원과 둘이 차 마시는 시간이 아니고 진달호 사원과 세 명의 새로운 선배 진혜영 대리, 문진수 과장, 이홍렬 과장이 함께 있었다. 진달호 사원은 그 사이에서 바보처럼 어색하게 소리 없는 미소만 짓고 있다.

“선배님들 새로운 멤버 데리고 왔어요.”

이홍렬 과장은 과거에 탁용팔, 탁용칠의 멘토였던 연륜 있는 과장이다. 160의 작은 키에 통통한 체형이다. 얼굴도 둥글둥글 통통하며 찢어진 눈에 상고머리다. 볼품없는 30대 후반의 독신 남자다. 목소리는 높고 얇은 까랑까랑한 목소리다. 외모가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지만 목소리도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다. 별일이 없으면 언제나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다. 하지만 지금은 별일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작은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야, 고철수 너 변규선 밑에서 배웠다며? 일을 지지리도 뭐같이 한다 싶더니 모자란 놈 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커서 그런가 보네. 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너는 욕 좀 먹어야겠어.”

억울하다. 변규선 대리를 들먹이며 제대로 못 배운 것으로 탓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 자식 이름을 다시 들으며 혼나는 것도 억울하다. 지금 상황에 또 욕먹을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도 억울하다.

“죄송합니다!”

일단 사과를 했다. 억울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 팀의 실세와 다름없는데 여기서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그 후폭풍이 예상 안 된다. 그래서 일단 죄송하다고 대뜸 말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저 좀 제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과장님.”

그리고 바로 부탁했다. 일 좀 제대로 알려달라고.

“허, 이 새끼 봐라. 패기 있네? 그거 하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넌 틀렸어. 회사라는 곳이 일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은 아니야,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커야지. 여긴 학교가 아니야. 너 내가 계속 지켜본다 잘해라잉”

탁용칠 사원과 탁용팔 사원도 이런 양반에게 업무를 배웠을 것을 생각하니 딱했다. 이홍렬 과장은 주로 사무실에서 여사원들과 메신저로 노가리를 깐다. 여사원들 사이에서 그는 귀염둥이 아저씨로 불리며 인기가 많다. 하지만 그뿐이다. 실속은 없다. 귀엽긴 한데 남자로의 매력은 없는 사람이다. 일단 남자치고는 키가 너무 작고, 볼품없는 몸매에 목소리도 듣기 싫은 목소리다. 그저 술 잘 사주는 아저씨로 통한다.

“에이, 이 과장, 적당히 해.”

문진수 과장이 말했다. 문진수 과장은 민귀남 파트장의 다음으로 제일 고참 선배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유명했다. 반달곰 같은 특유의 후덕한 인상과 등빨로 좋은 사람 같은 이미지다. 선후배를 모두 아우르는 순발력과 감각도 있다. 하지만 지내다 보면 그는 거의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본인의 일만 빨리 챙겨서 퇴근하는 그런 선배로 유명하다. 그래도 현명한 일 처리로 상사에게 트집 잡히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후배들의 트집은 신경 쓰지 않았다. 후배들이 혼나는 것에 대해서 무신경했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요, 여기 제가 지난주에 유럽에서 구매한 벨기에 초콜릿이나 같이 드시죠.”

진혜영 대리가 말했다. 여성으로 어린 나이에 공채에 합격해서 대부분의 남자 후배보다 어리다. 스포츠와 해외여행을 좋아하는 외향적 여성이다. 게다가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갖고 있어서 남성들에게 인기도 많다. 무쌍의 큰 눈과 높은 콧날, 볼록한 이마를 갖고 있다. 긴 생머리에 볼륨 파마를 했지만 하나의 머리끈으로 질끈 묶여있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털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다가설 수는 없다. 이 과장이 언제나 그녀 옆에 가까이 붙어서 그녀를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이야, 오이야, 혜영 양 외국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벨기에는 좀 어떻더냐?”

이 과장이 괴상한 말투로 물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여기 이 과장님 거는 특별하게 1유로 더 비싼 초콜릿 드릴게요.”

“어이쿠, 고마워서 어쩌나잉.”

진혜영 대리도 이 과장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1유로를 사용해서 이 과장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마 그 초콜릿의 가격은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과장은 철저하게 진혜영 대리의 말을 믿고 있다.

“철수라고 했니? 너도 하나 먹어.”

그녀는 회사에서 나보다 상급자이긴 해도 분명히 내가 나이가 많은데 바로 말을 편하게 해 버렸다.

“지금 야간 당번이 누구죠?”

장도영이 물었다.

“지금 김민수 과장이 야간일 거야. 이제 애들도 많아져서 그 친구 이제 야간에서 그만 나와도 될 거 같은데."

문진수 과장이 말했다.

“그러게, 낮에 우리 관리자도 부족한데.”

이홍렬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래도 그 선배 우리가 낮에 일 대충 해둔 거 전부 마무리해 주더라고요. 그렇게 일하는 과장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저 어제도 일 대충 하고 퇴근했어요.”

장도영이 말했다.

“야, 너 우리 맥일려고 하는 말이지? 그리고 일 대충 하는 것도 퍽 자랑이라고 떠든다.”

이홍렬이 발끈하며 말했다.

[지이이잉]

전화가 왔다. 탁용팔 사원의 전화다.

“철수 선배 어디예요? 자리에서 메신저 좀 확인해 주세요. 저희가 찾을 때 언제든 업무 대응할 수 있도록 별 큰일이 없으면 자리에 있어 주세요.”

[뚝]

전화는 그렇게 끊어지고 그 녀석의 말투를 들어보니 자리로 이동해야겠다 싶었다.

“선배 가시게요? 저희랑 좀 더 얘기하다 가시지.”

장도영이 조롱 반 아쉬움 반으로 말했다.

“안돼, 쟨 일하러 가야지.”

이홍렬 과장이 얄밉게 말했다. 난 아쉬움 없이 휴게실에서 선배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자리로 가는 길에 기댈 곳 없는 내 상황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의 내 자리마저 정말 구석진 모퉁이의 자리다. 신입사원 시절에 사무실의 없는 자리에서 겨우 만들어진 한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말로는 K1 본부와 K2 본부의 통합이지만 사무실 기준으로는 K1의 사무실의 먼지 쌓인 구석진 자리에 K2 공장에서 온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그중에 특히 내 자리는 맨 끝의 자투리 자리다. 그 자리 옆이 탁용팔 사원이고, 그 옆이 탁용칠 사원이다. 그렇게 일렬종대로 배치되었다.


[지이이잉]

사무실에 앉아서 메신저를 확인하는데 또 전화가 온다. 다행히 후배 녀석들은 아니다. 오랜만의 상대방에게서 전화가 왔다. 히타치 Korea. 의 박세용 과장이다. 변규선 대리에게 일을 배우던 시절에 협업하며 친해진 업체 과장님이다.

“안녕하세요. 철수님. 잘 지내시죠? 문안 인사차 전화했습니다.”

“아, 네네. 잘 기억합니다. 제가 뭐라고, 문안 인사는요. 크크. 아. 박세용 과장님. 지금도 히타치 장비를 가끔 만지긴 하는데, 이제 제 주장비가 SFA랑 한화 장비라서요. 그래서 연락을 한동안 못 드리게 되었어요.”

“아하, 그러시구나. 아. 참고로 저 이제 차장입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때 도와주신 덕분으로 차장으로 진급해 있습니다. 크크.”

“네네. 축하드려요. 정말. 저는 아직도 사원이에요. 어느 세월에 대리라도 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크크.”

“안 그래도 사실은 제가 그거 달아드리려고요."

그는 내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내년에 과장 진급이 확실한 말년 대리급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히타치 Korea. 는 배터리 장비회사 중 매출 상위권의 배터리 공정 장비를 만드는 외국계 기업이다. 지금 나의 존재를 더 인정해 주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민을 던져준다. 그래도 갑의 회사에서 을의 회사로 간다는 것은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서 패배자처럼 견디는 모습보다는 내게 어느 정도 기대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 고민의 시간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나흘 뒤 히타치 박세용 과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철수님, 저희가 참 아쉽게 되었네요.”

나흘 사이에 다른 사람을 스카우트하기로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내가 아는 사람이고 같은 팀 선배다. 바로 김민수 과장이다. K2 배선지옥에서 처음 만난 그 형은 언제나 워커홀릭같이 일만 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커피도 안 마시고 술도 안 마셨다. 언제나 아침 일찍 조용히 출근해서 묵묵히 일하고 조용히 밤늦게 퇴근했다. 심지어 퇴근했는데도 종종 다시 사무실로 나와서 말없이 라인에 들어갔다. 그리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수행했다. 학창 시절에도 그렇게 묵묵히 공부만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들어간 명문대학교. 그리고 배터리 대기업. 공장 통합이 되고 나서 그 형이 하는 궂은일은 두 배, 세 배 많아졌다. 그는 쉬는 법을 몰랐고 요령을 몰랐다. 내가 보기에 그 형은 심리적 탈진으로 숨조차 쉬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외국계 회사의 달콤한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그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차장(매니저급)으로 진급 보장, 연봉 동등 수준, 외국 유학, 실적에 따른 보상 등 이것만으로도 그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얼마 안 되어 김민수 과장은 그대로 조용히 퇴사했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이 안타까웠다.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어느덧 또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 신입사원은 두 명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다. 예전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던 후배들이 생각났다. 그 친구들은 잘 지낼지 자못 궁금하다.

“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랑 취미라든지 자유롭게 얘기해 주세요.”

문진수 과장이 진행했다. 회의 시간에 짬을 내서 신입사원들이 인사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남자 신입이 먼저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손준호입니다. 학교는 금성대 나왔고요. 이곳 금성시가 고향입니다. 살면서 학창 시절부터 대학교, 회사까지 이곳 금성시를 한 번도 못 벗어나게 되네요. 취미는 헬스입니다. 보다시피 제가 좀 왜소한 체구라서 근육으로 커버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손준호 사원은 소개와 같이 왜소한 체구이지만 옷 속에서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 뭔가가 계속 꿈틀거린다. 작은 체구지만 머리가 작아서 신체의 비율은 좋아 보인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맑다. 성격도 맑은 친구처럼 느껴진다. 해맑은 이 맑은 친구가 흙탕물과 같은 이런 지옥에 왔다는 것이 안타깝다.

[짝, 짝, 짝]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여기 대부분 경대 출신이라서 너 선배가 없어 안타깝다. 홍홍홍.”

이홍렬 과장은 변태처럼 웃으며 얘기했다.

“자, 다음 신입사원 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용. 저는 경수영이에용. 근데 좀 전에 얘기한 경대가 경희대는 아니죠? 경기대? 경상대? 어디 말씀하시는진 모르겠는데 저는 경희대 나왔구용. 서울이 고향인데 이런 시골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용. 그래도 잘 지내봐야죵. 아, 취미, 저의 취미는 대학로 소극장에 가서 연극이나 뮤지컬 보는거에용. 그럼 끝? 저 들어가도 되죠? 막이래. 키키.”

뭐가 저렇게 즐거운지 팀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는 자기소개다. 새로운 종류의 신입사원으로 인해 팀원 대부분은 황당한 표정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쟤 뭐야?”

장도영 사원이 혼잣말로 얘기했다.

“야 쎄다. 너보다 더하다. 홍홍홍”

이홍렬 과장이 장도영 사원에게 얘기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냈던 김민수 과장의 공백은 그 업무를 대신할 후배들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금방 젊은 피가 수혈되어서 사무실의 활기가 돌았다. 회사는 이렇게 기존 사원의 출혈이 있어도, 즉시 수혈을 하며 언제 터질지 모를 통증을 틀어막고 있다.


“우리 젊은 혈기 손준호, 경수영 같이 차 한잔하자.”

권준현 대리가 말했다. 모처럼 권준현 대리가 티타임을 소집했다. 인원은 진달호, 장도영, 손준호, 경수영 그리고 나 모두 사원들이다. 이번 주 야간근무는 탁용팔이었다. 과장급들은 직책자들과 모두 회의 중이고, 지금이 딱 쉬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역시 감각을 갖춘 연륜은 좋은 타이밍에 좋은 시간을 잘 만든다.

“요즘 어때 힘들지? 생산부랑 품질부, 양쪽에서 일을 던져주니깐 나도 정신이 없네. 홍렬이도 맨날 예민해져서 인상만 더럽게 쓰고 앉아있고 말이야. 크크. 너희들이 고생이 많아."

휴게실에 도착하자 권준현 대리가 말문을 열었다.

“네 뭐 정신없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메신저와 알람이 계속 쌓이고 있겠죠. 생산부랑 품질부는 저렇게 일을 키워놓고 맨날 보면 일찍 퇴근하더라고요."

진달호 사원이 현 상황을 비꼬면서 말했다.

“차차 나아지겠지. 신입사원들은 좀 어때? 이제 분위기 파악 좀 되었나? 너희들 야구팀 어디 응원해? 아따, 자리 비우자마자 찾는 전화가 오네…. 잠깐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얘기하고 있어.”

권준현 대리가 이번엔 신입사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전화를 받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음…. 저는 요즘 뭐 그냥 배우느라 정신이 없네요…. 정신없이 배우면서 일하다가 퇴근하면 운동할 기력이 없어서 근 손실 오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손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에? 오빠 어쩐지 계속 살 빠지고 있더랑. 주말에라도 운동 좀 하고 그러징. 저도 이게 일이 뭐 이 모양인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빨리 퇴근하고싶당. 막이래. 키키.”

경수영이 말했다.

“뭐야? 얘네들 봐라. 이제 며칠 되지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엄살이 심해? 다들 몇 년째 이렇게 하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경수영 너 이번 주말 나랑 같이 근무지?”

장도영이 말했다.

“에에에? 이번 주말 근무라구용? 저 대학로 가야 하는데? 저 주말은 회사 못 나와요. 공연 봐야해용. 그게 제가 사는 낙인데 공연 보지 못한다면 저는 슬픔의 늪에 빠질거에용.”

경수영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뭐야? 사차원인 줄은 짐작했지만 얘 왜 이래?”

손준호 사원이 말했다.

“공연 재밌겠네요. 공연은 역시 라이브로 봐야죠.”

진달호 사원은 지금의 심각한 분위기를 모르고 짧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경수영, 얘 정말 뭐야? 어떻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누구나 주말 근무는 하고 있어. 경수영 너도 나와야 하는 건 물론이지.”

장도영 사원은 경수영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뭐에용? 노예들도 아니고? 선배들 지금 하는 일들도 어이없는 일들이 많은데 그 짓을 주말까지 나와서 하라고 하는거에용? 근로계약서에 있는 내용이에요?”

경수영 역시 당황하며 말했다.

“야, 수영아 적당히 해.”

그녀의 동기인 손준호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어 보인다.

“에에? 뭐를 적당히 해? 맞아요. 아무튼 단언컨대 주말 근무는 완전 어이 털리네요."

경수영은 필터링 없이 본인의 하고 싶은 말을 다 얘기하고 있다.

“야! 너 적당히 해라.”

장도영 사원이 화를 내며 말했다.

“어머나! 놀라라. 왜 그래요? 이런 사람들하고 일 못하겠넹. 노예들. 패배자들.”

경수영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로 도망갔다.

“뭐야 쟤 소시오패스인가? 철수 선배는 쟤 어떻게 생각해요?”

장도영 사원이 내게 물었다.

“뭐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지. 우리 하는 모습을 보면 저런 관점도 이해는 간다.”

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기에 중립적으로 말했다.

"어휴…. 선배는 언제나 참 대답이 애매해요. 쟤가 무개념이죠. 개념 밥 말아먹은 듯.”

장도영 사원이 화를 삭이며 얘기했다.

경수영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다. 퇴사 후 꽃집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경희대 공대를 나와서 배터리 대기업을 왔다가 못 견디고 결국 꽃집에서 일하다니 그게 평생직업이든 시간제든 사회적인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회사가 무개념인지 인간이 무개념인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모든 인간은 무개념이다. 누구든 스스로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다. 그런데 진짜로 개념 없는 일들은 생각보다 많이 발생했다.

이전 07화 선배, 여긴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