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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Aug 10. 2024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자..

“철수야 내 자리에 좀 와볼래?”  

권준현 대리가 말했다.  

“네 형님.”  

난 여전히 그를 형이라고 불렀고 권준현 대리는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회사에서의 호칭은 직급으로 부르는 게 원칙이지만 실제로는 편하게 형 동생으로 호칭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철수야, 이번에 개발팀에서 넘어오는 신제품이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공정이 추가되거든. 이름이 티타늄 공정이라고 줄여서 T로 부르면 되고. 전용 장비가 곧 입고될 거야. 너가 전에 잘 만지던 히타치 장비야.”  

권준현 대리는 내게 업무를 주면서 업무가 오게 된 배경과 간단한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격려와 함께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는 말까지 한다. 그의 모든 한마디 한마디에는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의사소통에 문제도 없다. 티타늄은 줄여서 T라고 한다. 티타늄 위주로 구성된 화합물이다. 단단하다. 게다가 전기 전도성도 뛰어나다. 조립 공정에서 전기를 잠시 저장하는 축전기(커패시터) 또는 다른 물질들이 섞이는 것을 막는 장벽의 역할로도 활용된다. 과거에 담당했던 공정의 확장판이다. 이 확장판 물질을 금성전지 양산과정에서 신제품에 적용하여 최초로 다루게 되었다. 그 주 담당자가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욕심이 생긴다. 기왕에 다루는 거 잘 다루고 싶다.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외친다. 내겐 이것뿐이다. 3년 차에 진정한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직원이 된다. 이제 제대로 된 회사 생활의 시작이다..


막상 다루게 된 신규 장비는 역시나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장비 설치가 어려웠던 것은 둘째 치고, 공정 환경을 설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상 업무에 대응하며 틈틈이 개발팀으로부터 받은 신규 공정 관련 설명서와 각종 보고서를 연구했다. 마침내 납기에 맞게 공정 환경 설정까지 완료되어 양산공정에 적용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문제는 양산을 진행하는 중에 더 많이 발생한다. 여석수 부장은 뒤늦게 T 공정으로 본부장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하루 동안 공정의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을 한다.  

“처..처..철수, 여기 좀”  

“네”  

“바..방금 조립 품질이 튄 게 하나 있어서 말이야.”  

5분 전에 튀었다. 퇴근해도 공정의 문제가 발생할까 늘 노심초사했다. 한 번은 저녁을 먹고 아홉 시에 퇴근 후 조금 꺼림칙한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 밤 열 시에 다시 출근했다. 야밤의 사무실은 대부분 퇴근 후 아무도 없었고 야간 담당이 막 출근해서 있었다. 야간 담당자에게 업무 확인을 부탁해도 된다. 하지만 이쯤 되니 나만큼 공정에 대해서 이해하면서 조건을 바꾸는 사람은 없었다. 나만 잘하는 업무가 생긴다는 것은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게 문제였다. 이 공정은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다른 팀에서도 연락이 자주 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공정 담당이시죠? 저는 유리지옥의 김 대리인데요. 이게 조건을 어떤 방법으로 만들고 계시죠? 조건을 변경하는 것에 따라서 저희 공정과도 상호작용을 하는 부분이 의심되어서요.”  

“네. 그게 상부에서 눌러주는 조건과 측면에서 펴주는 조건이 상호 보완 작용을 하고 있어서요. 그 두 가지 조건에 따라서 후속 공정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상부를 많이 조절한 조건과 측면에서 조절한 조건으로 나눠서 제품을 한번 보내 볼게요. 그걸로 같이 평가를 한번 해보시죠.”  

“안녕하세요. 생산팀 장 파트장이에요. 그 저기 공정 진행 속도를 조금 올릴 수 없을까요?”  

“네. 아쉽게도 이 공정의 초기 설정 주기가 1x라서 공정을 한번 진행할 때마다 Cleaning을 해줘야 하거든요. 2x로 올리는 순간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몰라서요. 앞으로 소량의 여유 제품으로 2x에 대한 평가는 한번 해보겠지만 당장은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어느새 생산부에서 신공정하면 고철수 사원으로 통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계속 발목을 잡히며 부담은 가중되고 있지만 그게 썩 나쁘지는 않다. 인정을 받는 기분도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고 있다. 공정에 익숙해지니 신공정 양산화를 도맡아 한다는 자부심도 생긴다. 그렇게 신공정 양산화에 집중하는 사이 연말이 되었다.


어느 아침 회의 시간이다.  

“아 맞다. 문 과장, 그거 이번에 인사팀에서 안내받은 그…. 그거 설명 좀 해줘 봐.”  

여석수 부장이 말을 꺼냈다.  

“아. 그. 순위평가? 그거 말씀이시죠?”  

문진수 과장이 모르는 척 되물었다. 알면서 능구렁이처럼 모르는 척 되묻는 것이다.  

"마…. 맞아, 그…. 그거.”  

그렇게 대답하고 여석수 부장은 팔짱을 끼고 의자를 뒤로 힘껏 젖혔다.  

“여러분 인사팀에서 이번에 새로운 인사정책을 적용한다고 하네요. 저랑 부장님 둘이 인사팀 세미나에 가서 간단하게 설명회를 들었고요. 외국의 어느 기업에서 가져온 거라고 하던데 이름이 순위평가라고 하네요.”  

문진수 과장이 설명했다.  

“응? 무슨 순위를 만들어?”  

이홍렬 과장이 물었다.  

“뭐 나는 가수다의 청중평가단 투표라도 해요? 꼴찌 하면 하차인가요? 크크.”  

장도영 사원이 물었다.  

“흠. 그게 아니고 파트원들 상호 간에 순위를 매겨서 전체 순위를 집계한다고 하네요. 예를 들어서 장도영 사원 너가 우리를 줄 세워서 순위를 매겨야 하는 거고, 모두 그렇게 본인만의 순위를 만드는 거예요. 그것을 종합해서 본인의 종합 순위가 집계되겠죠.”  

문진수 과장이 예를 들어 설명했다.  

“아니 그럼 그거 그냥 인기투표 아니에요?”  

탁용칠 사원이 정곡을 찔렀다.  

“흠…. 그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내가 바라보는 동료의 업무 역량을 보고 순위표를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순위를 바탕으로 평가자가 여러분들을 인사 평가할 때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상이에요.”  

문진수 과장이 설명을 마쳤다.  

이것은 다면 평가라고 하지만 그냥 단순 인기투표다. 사람들의 심리가 그럴 수밖에 없다. 동료들은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각자의 순위 결과는 여석수 부장에게 자동으로 취합되었다. 그리고 여석수 부장이 한 명씩 불러서 평가 결과에 대해 면담을 진행했다. 내 면담 차례가 되었다. 뻔한 평가의 결과보다는 과연 순위가 몇 등일지 그게 더 궁금했다.


면담을 위해 회의실에 들어가자 여석수 부장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왔어? 그…. 그래, 뭐 일단은 올해 한 해 수고했어.”  

어두운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뭐 그…. 그냥 바로 얘기해 줄게. 너…. 너가 꼴찌야. 그리고…. 딱히 꼴찌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너에게 저평가를 줬어.”  

“네? 그래요? 흠. 뭐 알겠습니다.”  

사실은 예상했던 결과다. 내가 신공정을 도맡아 하게 되었지만 아니꼽게 바라보는 선배들과 나를 업신여기는 후배들 그들이 내 순위를 꼴찌로 매겼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평가는 이해할 수가 없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뭐 할 말 없어?”  

여석수 부장은 자리가 불편한지 손목시계를 보면서 빨리 나가고 싶은 눈치로 말했다.  

“할 말 많죠.”  

기회는 이때다 하고 대답했다.  

“뭐, 뭐야? 뭐, 뭔데 말해봐 한번.”  

“저는 사실 K1 특수배선에서 배우고 여기까지 오게 되어 기반이 조금 부족한 건 맞습니다. 그래도 K2라는 신규 공장에 가서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다양한 업무를 배웠죠. 그래서 이번 공장 통합 이후에도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단지, 기존의 선후배들의 기가 드세서 피곤했을 뿐이죠.”  

“뭐, 뭐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너가 더 잘했어야지.”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무엇을 잘했는지 얘기해 봐.”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신제품의 신공정을 이상 없이 양산에 적용했죠. 아시겠지만 다른 팀에서는 신공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혹은 궁금한 경우 언제나 저를 찾습니다. 그리고 바로 해결합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밤에도 출근해서 업무에 대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업무의 공백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른 팀의 대리, 과장급들이 저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셨죠. 그룹 대외적으로 순위평가를 한다면 제가 상위권에 있었을 거예요."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이고 머리야. 그….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직책자의 평가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건 월권이야.”  

“저는 평가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만, 단지 직책자의 무능함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책은 파트장이지만 모름지기 팀의 리더라면 팀원의 고충을 파악하고 저런 단순 인기투표보다는 업무 역량과 가능성을 보고 등급을 매겼어야죠. 결과적으로 피드백 역시 그러한 근거를 토대로 얘기를 해주셔야 하고요. 제가 뭐라고 따지거나 화를 내는 건 아니고 제 생각을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야! 그만하자 그만해 내가 졌다. 넌 예전부터 참 마음에 안 들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는 목덜미를 잡으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여석수 부장은 그렇게 목덜미를 잡으며 본인의 자리로 절름발이처럼 절뚝이며 걸어갔고 겨우 자리에 앉아서 계속 한숨을 쉬었다.  

“어휴”  

내 자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으….”  

[꽈당]  

여석수는 의자에서 떨어져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입과 손을 떨며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그 시간, 그 자리 근처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다른 일을 보러 갔는지 커피를 마시는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내가 마지막 면담을 하였기에 면담을 마친 모두는 본인의 평가 결과에 안도하며 끼리끼리 커피를 마시러 갔을 것이다. 난 일어나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누워서 입과 손을 떨고 한 번씩 몸 전체적으로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두 눈은 나를 보며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두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커지는 눈은 혈관이 확장되며 충혈되고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을 보니 혈압약으로 보이는 알약과 그 밖에 몇 가지 약이 책상 한쪽에 가득했다. 그의 눈동자 흰자위가 점점 많아지며 동공이 풀리고 있다.  


여석수 부장은 그렇게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 고혈압이 그의 지병이기에 약을 달고 살았지만, 과도하게 업무에 몰입하다 보니 약 시간을 자주 놓쳤다. 관리받지 못한 그의 혈관은 다혈질의 그 성질을 못 견디고 마침내 터진 것이다.  

“쯧쯧쯧…. 평소에 관리했어야지.”  

“저렇게 될 줄 알았어.”  

“회사 사무실에서 저렇게 되어버리다니 조금 딱하긴 하지만 불쌍하지는 않네.”  

팀원 중에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회사는 냉정하다. 여석수 부장의 자리는 하루 만에 정리되고 새로운 팀장 파트장이 발령되었다. 팀장, 파트장 둘 다 다른 팀에서 왔다. 새로운 팀장은 K2 공장에서 일반 조립 팀장이었던 강건함 팀장이다. 공장 통합으로 인한 조직개편과 K3 공장 건설로 K3 프로젝트팀으로 파견되었던 그는 K1 공장 팀장 공석의 발생으로 갑작스럽게 다시 불려 왔다. K2 공장에서 겪은 경험으로는 아마도 쉽지 않을 느낌이 든다. 그는 여전히 창백한 피부에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매를 갖고 있으며, 그 인상을 더 날카롭게 만드는 각진 옛날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작년에만 해도 머리카락의 일부분만 희끗희끗했지만 이제는 염색을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마도 K2 신규 공장에서 팀장을 하다가 또 다른 신규 공장으로 팔려 가서 마음고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파트장은 경호준 파트장이다. K2 유리지옥 팀에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의 외모는 등산길에서 한두 번 만나게 될 선량한 아저씨처럼 보인다. 야외 활동을 많이 하는지 피부가 검붉은색이며 나이에 비해 주름이 깊다. 그 주름은 웃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생겼지만, 누구도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같은 파트에서 그를 겪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를 욕한다. 파트원들을 업무로 박살을 내버려서 정신 차리기 힘들게 만드는 행위가 그의 특성이다. 이렇게 회사는 마치 준비된 것처럼 인사이동을 진행했다. 무능력한 여석수 부장의 말로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체자들을 곧바로 직책자로 발령했다.  


“아침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문진수 과장의 진행으로 새로운 팀장, 파트장과 아침 회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새로 오신 팀장님, 파트장님 한 마디씩 듣겠습니다. 팀장님 앞으로 나오시죠.”  

모두는 새로운 리더의 말과 행동을 궁금해하며 그들의 언행을 기다렸다. 강건함 팀장은 맨 앞에 자리 잡고 각을 잡고 앉아있다가 일어났다.  

“뭐, 선수들 앞에서 딱히 할 말은 없고 배터리 품질의 모든 문제는 장비라고 봅니다. 장비를 장악하는 팀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 파트장도 한마디 해야죠.”  

그는 굵고 짧게 말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 이거 쉽지 않네요. 팀장님이 장비를 말했지만 저는 공정을 우선 챙기는 사람입니다. 잘해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그 역시 다시 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꼈다. 팀장과 파트장은 서로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장비를 탓하고 공정을 탓하며 서로를 탓하는 모습이 불 보듯 뻔하게 예상된다. 안 봐도 비디오다.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겨울은 그렇게 누군가의 끝과 누군가의 시작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때 이른 봄을 맞이하게 된다. 이맘때의 회사는 언제나 그렇게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그 무책임의 순환 속에서도 새로운 시간은 계속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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