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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Aug 28. 2024

새로운 생명이 내 앞에 다가왔다.

새로운 시작..

병가휴직 57일째. 늦잠을 자고 열 시가 되어 일어났다. 아내가 예쁘게 차려준 초밥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리프레쉬마인드로 향하는 날이었다. 분노에 대한 명상을 하면서 잊고 지냈던 분노들이 다시 떠올랐다. 과거의 상황이 다시 닥쳤다면 어떻게 더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수업 후, 수줍게 사인을 부탁했더니 친절하게 전용 붓펜으로 따뜻한 말과 함께 사인을 해주셨다. 작은 기쁨이었다.


병가휴직 58일째. 홍콩영화를 보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중경삼림', 오후에는 '해피투게더'를 봤다. 두 영화 모두 왕가위 감독의 작품으로, 양조위가 출연했다. 예전에 상담소에서 이야기해 준 영화들이라 미리 스토리에 익숙했지만, 영상과 음악을 통해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어렵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들이었다.  차량에 아내가 쏟은 닭국 냄새가 빠지지 않아 처음으로 돈을 주고 스팀 세차를 했다. 실내외 세차에 3만 5천 원을 썼다. 직원은 말이 많았고, 추가 비용이 더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올여름 첫 팥빙수를 맛보았다. 무난한 하루였다.


병가휴직 59일째. 중요한 날이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야했다. 아침 일찍 갔더니 다행히 앞에 대기자가 한 명뿐이었다. 예상보다 좀 기다린 후 차례가 되었다. 의사는 나에게 사춘기 같다고 말했다. 나와 삶에 대한 의문은 평생 가져가는 것인데, 사춘기라니. 공감이 가지 않았다. 충동적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회사에 진단서를 제출하러 오랜만에 공장을 방문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조심하며 서둘렀다. 다행히 서무가 나와줘서 서류를 바로 전달하고 서둘러 나왔다. 서약서를 작성하고 나오는 동안, 공장에서 연락이 올까 봐 불안했다. 오랜만에 공장 근처에서 옛 동료를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여전했지만, 바빠 보였다. 동료들은 나에게 복직을 권유했다. 집에 오는 길, 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메시지에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시며 여러 속상한 이야기를 하셨다. 내 걱정과 아버지 걱정이 많으셨다. 어머니를 달래 드리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집에 오니 아내가 늘 그렇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연히 내가 열어본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려져 있었다. 아내가 임신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신기했다. 아내를 꼭 안아주고 사랑스럽게 뽀뽀해 줬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가휴직 60일째.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고, 일찍 눈이 떠졌다. 회사에서 직무 스트레스 상담을 받는 날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병원의 외주 상담사님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본 좋은 날이었다. 저녁에 속이 좋지 않았다.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대장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항문 봉합 및 장루라는 끔찍한 수술을 보며 다음 주에 내시경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병가휴직 61일째. 종일 게임을 하며 잘 쉬었다.


병가휴직 62일째. 낮에는 오랜만에 대청소를 하고 낮잠을 잤다. 저녁에는 고민 끝에 아이폰 8을 해외 직구로 주문했다. 갖고 싶었던 것을 드디어 샀다. 곧 묻어 둔 적금 한 구좌가 끝나니 여유가 될 것 같다.


병가휴직 63일째. 산부인과에서 아내의 임신을 확인받았다. 아기를 갖기 어렵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쉽게 생기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위, 장 내시경 검사가 조금 걱정이 된다.


내가 병가를 내고 쉼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이 시간이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다.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감정들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분노에 대한 명상을 하며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이제 와서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홍콩 영화들은 나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익숙한 스토리라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내 삶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뜻밖의 소식이 찾아왔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이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쁨이 솟아올랐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내 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동안의 고민과 불안이 잠시 잊힐 만큼 놀랍고도 기쁜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 앞으로의 길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쉼이 끝나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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