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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Sep 18. 2024

서로의 상태를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병가휴직 78일째.


오늘은 처가에 가서 하루 자고 오는 날이다. 간소하게 짐을 챙기고 출발했다. 아내는 집에서 바쁘게 제사 음식을 준비 중이고, 조카들은 각각 학습지를 하고 있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바쁘다. 형님과 근처 아파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구경하러 가게 됐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자세히 살펴봤다. 저녁에 아버님이 오시고 함께 닭갈비를 먹었다. 술을 한 병씩 마시고 나니 취해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뒤척였다.


병가휴직 79일째.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제사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아내의 도움으로 성묘는 가지 않고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종일 자고 나니 몸 상태가 좀 나아졌다. 저녁에는 갈비찜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가 3박을 위한 짐을 다시 챙겼다.


병가휴직 80일째.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했다. 차가 막힐까 봐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6시 조금 넘어서 출발했는데, 덕분에 한 시간 반 정도 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니 반가웠고, 아내의 임신 소식에 무척 기뻐하셨다. 아버지와 양주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노동부와 한판 하셨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병가휴직 81일째.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했다. 온탕, 약탕, 사우나, 냉탕을 오가며 개운하게 몸을 풀었다. 목욕 후에는 옛 동네를 방문했는데, 중학교는 많이 변해 있었고, 초등학교와 아파트는 그대로였다.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저녁에는 다 같이 모여 중식을 시켜 먹었고, 가족들에게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했는데, 다들 쉽게 믿지 못하는 듯했다. 분위기는 좋았다.


병가휴직 82일째.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푹 쉬기로 했다. 그런데 점심에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신포시장에서 닭강정을 사 오셨다. 맛있게 먹고, 어머니의 입국 소식을 들었다. 저녁에 어머니와 작은 이모, 작은 외삼촌과 만났는데, 중국 여행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추김에 저녁 식사 전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했는데,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다. 밤에는 동생과 함께 양꼬치에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서 과음했다. 결국 떡실신했다.


병가휴직 83일째.


전날 숙취 때문에 온종일 힘들었다. 목도 아프고 두통이 심했지만,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나니 숙취가 조금 나아졌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오른쪽 아랫배가 아프다고 해서 걱정이 된다.


병가휴직 84일째.


오늘은 오랜만에 집에서 푹 쉬었다. 열두 시간 동안 게임을 했다. 메탈기어 솔리드, 위닝, 용제로를 했는데, 용제로는 거의 끝을 본 것 같다. 아내의 배 상태는 어제보다 나아 보였지만, 여전히 걱정이 된다.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병가를 시작한 지 80여 일이 지나고 있다. 일터를 떠나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안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하루하루가 늘 편안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에서 약을 먹으며 몸과 마음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은 종종 가라앉고, 때로는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모두들 기뻐했지만, 어딘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반응이 재미있었다. 나 역시 그러한 기분이기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상태가 더 좋아지길 바라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목욕을 하고,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과음하고 노래방에서 떡실신할 만큼 술에 취한 날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랜만에 느껴본 자유 같은 것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아내의 배가 아프다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나 역시 내 상태를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작은 희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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