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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Nov 27. 2024

인생은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리라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해 보자.

병가휴직 146일째, 제주도로 떠나는 날이었다. 급하게 세면을 하고 짐을 챙겨 정확히 일곱 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큰 섬, 유명한 관광지인 제주도가 궁금했다. 아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비행기는 금세 도착했다. 제주도의 맑은 공기와 바람이 참 좋았다. 렌트한 차량은 G4 렉스턴이었다. 크고 듬직하지만 저속에서는 조금 답답했다. 그러나 승차감과 최신 기능 등 여러 면에서 너무 좋은 차량이었다. 점점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점심으로는 블로그에서 찾은 문어라면을 먹었다. 사장님이 조금 엄격하셨다. 후식으로 들른 당근 주스 카페에서는 경치와 분위기, 소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곳이 한국에도 있는데 왜 진작 오지 못했을까. 당근 여섯 개를 갈아 만든 주스는 정말 일품이었다.


알쓸신잡에서 알게 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두 시간으로는 부족했다. 애플 1, 2와 리사 등 최고의 제품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고전 게임부터 닌텐도 64, 게임큐브, 오큘러스까지, 수많은 게임 잡지들까지. 나에게 여기는 꿈과 환상의 장소였다.


저녁으로는 전복 문어 뚝배기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찬바람을 맞으며 펜션에 도착했다. 뭔가 관리되고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낡은 곳이었다. 그래도 씻고 나니 개운했다. 아내는 운전을 많이 한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G4 렉스턴은 운전할수록 매력이 있었다. 어느새 차 견적을 보는 나를 발견했다.


병가휴직 147일째, 푹 자고 일어난 제주도의 아침이었다. 눈을 뜨니 아홉 시 정도였다. 우리가 묵은 펜션은 낡았지만 따뜻하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아침의 제주 바다는 맑고 고요하면서도 파도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 끼로 제주 삼거리의 갈치조림을 먹었다. 기사식당의 간판답게 너무 맛있는 갈치와 무조림이었다. 밥도둑이었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유동커피로 출발했다. 맛집답게 사람들이 북적였다. 유일한 2인석에 자리를 잡고 아내는 사과 주스를, 나는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드립 커피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기다린 것 이상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즐겁게 두 시간 동안 독서를 했다.


독서 중에 한 친구가 생각나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회사에 퇴사의사를 밝혀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괜히 내가 불씨를 키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저녁은 치킨을 포장해 펜션으로 돌아왔다. 간만의 치킨은 맛있었다. 아내 덕분에 무료로 치킨도 먹고 펜션도 이용하고 좋았다. 치맥을 하며 오랜만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수요일에 내가 토라진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풀었다. 아내가 늘 사랑스러웠다는 나의 설명에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일찍 체크인을 해서 그런지 씻고 나서도 아홉 시가 안 되었다. 오늘은 정말 큰 일정 없이 무리 없이 잘 힐링했다. 다만 어제 낮에 아내에게 하혈이 조금 있다고 들어 내내 걱정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그 이상의 큰 일은 없었다. 아내와 뱃속의 아이 둘 다 건강하길 바란다.


병가휴직 148일째, 전날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잠들었음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기상했다. 피로도 좀 풀린 느낌이었다. 두통이 조금 있었는데 나아졌다. 아내와 귀엽게 몸싸움을 하며 일어났다. 둘 다 제주도에 와서 속이 안 좋았다. 나는 평소에 잘 해결되는데 이번에는 조금 답답했다. 어제 잘 쉬었으니 오늘은 아내에게 더 맞춰 관광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침의 각오와는 다르게 성난 날씨와의 사투를 벌인 하루였다. 점심으로 먹은 고기국수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으나, 카멜리아힐에서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구경을 강행했다. 사실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좋아해서 참고 견디며 함께 다녔다. 아내의 건강도 걱정되어 몸도 마음도 피로했다. 저녁으로 먹은 흑돼지를 먹으며 기분 좋게 오후를 마무리했다.


낮에 힘들어서 그런지 아내에게 별로 잘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은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투숙객이 아무도 없는 게스트하우스는 보너스였다.


병가휴직 149일째, 게스트하우스 첫 경험이었다. 아무도 없었던 덕에 조용히 쉬다 잘 잤다. 하지만 어젯밤 회사 사무실에서 선배들의 눈치를 보는 악몽을 꿨다. 무의식 중에 복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로 사장님이 해준 토스트 샌드위치와 주스를 맛있게 먹었다. 제주도 마지막 날이었다. 아쉽지만 힘들 땐 한 박자 쉬며 천천히 구경한, 수고 많이 한 여행이었다. 마지막 하루도 즐겁게 보내고자 했다.


점심으로는 블로그에서 찾은 수제 햄버거를 먹었다. 개당 15,000원이라는 가격이 후덜덜했지만 맛은 좋았다. 카페에 들러 두 시간 동안 독서를 했다. 책을 완독하며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들이 많았다. “괜찮아. 인생은 말이지, 살아만 있으면 의외로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어. 인생이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내가 듣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저녁으로는 공항 근처의 돈가스집에서 식사를 했다. 어느덧 차량 반납 시간이라 렉스턴과 아쉽게 이별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사람 많은 제주공항에서 금방 비행기에 탑승해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집은 큰 사고 없이 조용히 잘 있었다. 다만 사람의 온기가 없어 냉골과 같았다. 보일러를 돌려도 추운 걸 보니 육지는 정말 추웠구나 생각했다.


아내가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잘한다고 했는데 좀 부족했나 싶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걱정한다.


병가휴직 150일째, 오랜만의 밤이었다. 추웠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새벽 네 시에 정신을 차리고 불을 끄고 제대로 누웠다. 아내 역시 여행의 여독으로 인해 기절한 듯했다. 아내에게 아이가 있어서 아마 나보다 더 피곤했을 것이다.


금세 찾아온 리프레쉬 마인드 차 명상 2주차였다. 제주도에서의 악몽 때문인지 어젯밤에는 회사 임원 면접을 보는 꿈을 꾸었다. 복직에 대한 압박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차 명상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차는 우롱차였다. 맛이 달콤하고 뭔가 개운했다. 항산화와 지방 분해 성분이 있어서 인기 있다고 하니 나도 자주 마셔야겠다. 명상을 하며 잠시 잠이 들었다. 집에 가서 따뜻한 밥 먹고 푹 쉬고 싶었다.


병가휴직 151일째, 또 악몽을 꿨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힘든 상황이었다. 한 연예인이 나왔다. 출소한 건지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건지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고생했다고. 좀 이상한 꿈이었다. 출근 날짜가 가까워짐에 대한 압박인가. 마음가짐을 편하게 먹어야겠다.


오늘은 점심 먹고 오랜만에 골프를 쳤다. 추워도 꾸준히 해야 한다. 제주도 다녀오느라 오랜만의 골프였는데 생각보다 잘 맞았다. 잘 맞는 느낌이 좋았다.


골프 치고 오랜만에 처가에 들렀다. 어머님이 혼밥 하신다길래 같이 먹으려고 갔는데 아버님도 오셨다. 메뉴는 굴 영양 돌솥밥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계산은 먹자고 한 내가 당당히 했다. 집에서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집으로 왔다. 아내에게 아이가 생기고 처음 뵙는 장인장모님이라 뭔가 뿌듯하고 기분 좋은 하루의 마무리였다.


병가휴직 152일째, 아침에 일어나니 아홉 시 반쯤이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지난밤 기절하듯 잠들었다. TV의 수면 기능을 해두었는데 잘해둔 것 같다. 요즘 왜 이렇게 몸이 쉽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출근할 생각에 점점 긴장이 된다. 아내가 점심 약속이 있어서 라면과 밥을 맛있게 먹고, 갑작스레 연락 온 지인의 티타임 요청에 나갈 준비를 했다.


지인과 네 시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랜만이라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자리가 한 번 싹 바뀌었다던데 내 자리는 있을까 궁금하다.


저녁은 아내의 전 직장 동료의 돌잔치로 맛있게 먹었다. 자리가 널널해서 먹기 편했고 아내가 경품도 당첨되어서 좋았다. 아내는 밤에 또 다른 모임이 있어서 그쪽으로 바로 가고, 나는 집으로 와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평소 자녀 이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다. ‘소유’ 편하고 한가롭게 배우고 공부하고 즐기라는 뜻이다. 장자에 나온 ‘소요유’에서 따온 이름이고, 고전 소설 ‘구운몽’에 나온 주인공 이름인데 느낌도 좋고 뜻도 마음에 든다.


아버지께 ‘소유’라고 내가 지은 아들 이름을 말씀드렸다. 철학관 이야기를 하셔서 조금 그랬지만 그러려니 생각하며 더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이름이 중요하지만 내가 좋은 뜻으로 붙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좋은 이름을 짓는다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이름이 적절한지 전문가의 의견은 한 번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 여행을 통해 나는 조금씩 우울증을 극복해 나갔다. 자연 속에서 아내와 함께한 시간들,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작은 일상에서의 행복을 되찾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복직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은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인생은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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