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아주 오래전, PC 통신이 유행하던 시절 무라카미 하루키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그저 일본작가를 좋아한다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작가의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독후감을 쓰거나 글을 남겼습니다. 다들 뜨겁게 활동했고 즐거웠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을 때도 좋아하는 작가가 같다는 공통분모가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금새 어울리게 했습니다.
10대에서부터 40대,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주파수가 비슷하고 결이 비슷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림도 궁극적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다. 그리는 이유는 자신의 느낌을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하지만 그림은 외로움이라는 그림만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따로 가진 듯하다. 음악이나 춤 공연은 여러 사람이 함께 웃으며 울며 감상하는 데 반해 그림은 감상도 오롯이 혼자 한다. 그림 감상은 내 속의 외로움과 네 속의 외로움이 조용히 만나 어루만져주고, 손잡아주는 일 같기도 하다. 서로의 마음속 외로움을 알아차린 것 같은 찰랑찰랑한 느낌.
내 외로움을 견뎌서 네 외로움을 여의는 일. 그림이다. 인생이다.
[그림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김미경, 한겨레출판사]
그렇다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어떨까요? 여느 모임이건 비슷하지 않을까요?
다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혼자 외롭게 작업하는 것에 익숙한 분들이시니 내성적인 편인 것 같기도 하구요. 한 편으로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같은 취미를 가진 분들과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린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으로 제가 사는 곳의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인구 6만의 작은 동네에 살고 있기에 성인 대상 미술학원도 없었습니다. 그림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드로잉 소모임을 찾아서 들어갔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강제퇴장을 당하는 씁쓸한 경험도 했습니다.
https://open.kakao.com/o/gZKthw8
그러다 우연히 어반스케치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오픈채팅 방에 들어가게 되고, 300여명(지금은 600명!)이 넘는 분들 가운데에서 인근 도시, 광주에 계신 세 분을 알게 되었고 함께 만나 광주 어반스케치 동호회를 만들었습니다.
많아야 3~4명이 모여 함께 그리다가 조금씩 회원이 늘어 코로나 이전의 매월 정기 모임에는 10명 가까운 분들이 모여 함께 그렸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광주 어반스케치 동호회의 정기모임은 매월 둘째주 토요일, 대부분 오후 두 시에 시작해 다섯 시에 마칩니다.
점심을 먹고 만나, 저녁을 먹기 전에 모임을 마무리 합니다. 30분 정도 인사하고, 그동안 각자 그린 그림을 봅니다. 인스타그램이나 오픈 채팅방을 통해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만 보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보면 그 감동이 또 다릅니다. 서로의 칭찬과 격려로 큰 응원을 받게 됩니다. 이후에는 그림 그릴 장소를 정한 후 두 시간 정도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 서로의 그림을 보고 인증사진을 찍고 헤어집니다.
거리두기 지침으로 삼삼오오 모여앉아 그림을 그리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재미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모임을 하고 나서 함께 맥주 한 잔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분들끼리 일찍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모임을 시작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그림만 그리고 헤어집니다. 초기에는 이런 진행이 조금 무미한 것은 아닌지, 유대관계가 두터워질 기회가 없는 운영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림 동호회를 운영해 보신 선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림 이외의 활동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잡음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림만 그리고 헤어지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시더군요.
어쨌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은 항상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합니다.
가끔 번개로 시간이 맞는 회원들이 야외에서 모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구도를 정하고, 자리를 잡습니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작년 5월 한적한 동네 공터에 앉아 활짝 꽃을 피운 고창 중산리의 이팝나무를 그렸을 때가 기억납니다. 화창한 봄 날씨를 한껏 누리며 함께 그리고 몰입하는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김형석 교수님도 그러시더군요. (중략)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떻게 고독을 이길 수 있는지 여쭤봤더니
움츠러든 삶의 공간을 넓혀야 하고 나이 들어서도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외로움을 없애려는 발버둥 대신, 설렘을 공급하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입니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김재환, 북하우스]
코로나로 함께 만나 그리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지는 시대입니다. 온라인으로 ‘얕고 넓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더 선호되고, 콜포비아를 넘어 아날로그 포비아, 오프라인 포비아로까지 넘어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오프라인에서 함께 만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 첫 발을 내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 그림 그리는 사람을 만나 함께 그리는 즐거움을 맛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림 그릴 때 생기는 외로움이 동질감으로, 연대감으로 변하는 기회가 됩니다.
어제도 새로 가입한 분이 처음 오프라인 모임에 나오셔서 함께 그렸습니다. 서로의 이름만 알 뿐, 나이도 직업도 잘 묻지 않습니다. 처음 나오신 분에게 특별한 배려나 관심이 없어도 모임이 끝날 때면 활짝 핀 얼굴로 인사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온라인에서 검색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다른 분들의 경험을 쉽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사용하는 종이나 물감, 펜을 써보기도 하고 선물받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도 처음에는 장비욕심이 가득했습니다. 좋은 도구를 사용하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에이, 한 번 써 봤더라면 돈낭비는 안했을텐데....’하는 후회의 순간들이 책상 아래 박스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두 번째 함께 그리는 순간 일상의 특별함이 더해집니다.
사람많은 카페나 길거리에서 혼자 그림을 그릴 때면, 일상의 독특한 배경이 되지만, 함께 그리면 그 풍경의 주인공이 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그림 그리는 모습을 흘깃흘깃 보던 사람들이 곁에 다가와 한참을 바라봅니다. 저도 관종의 기질이 다분해져서 어르신들과 대거리를 주고 받으며 그리는 것이 익숙해졌습니다. 그 곳에 사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림에 그 골목, 그 동네의 이야기가 담깁니다. 사람들의 “그리고 싶다”라는 마음을 마주하게 되고 제 그림생활의 용기가 뿌듯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
창작은 외로운 일이라 친구가 필요하다.
모서리에 당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나 또한 그 밖을 뛰쳐나와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미술문화 출판]
“아직은 내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는 것이 창피해요.”
“조금 더 실력이 쌓이면 모임에 나가보려구요.”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그림을 그리고 계신가요?
그래도, 아직 머뭇거리고 계신가요?
[기획자의 책 생각, 이정훈, 김태한, 책과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