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통제하는 사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매년 학생들과 함께 읽는 책이다. 빽빽한 글씨체에 그림 하나 없는데 독서를 싫어하는 학생도 몰입하는 것을 보면 이야기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책에 함축되어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모든 이야기를 쓰려면 그냥 동물농장을 필사해서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그만큼 군더더기도 없고 한 문장 한 문장에 함축된 의미도 많은 책이었다. 작가는 스탈린이 러시아를 지배하는 모습을 동물농장 속에 집어넣었다. 아는 것이 많은 돼지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며 다른 동물들 위에 서서히 올라섰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계명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 특별하다'로 바뀌고 네 발로 걷던 돼지들이 인간 흉내를 내며 두 발로 뒤뚱거렸다. 동물농장의 주인은 동물들이 맞았을까.
동물들은 혁명을 통해 농장 주인이었던 인간 존즈를 농장에서 몰아냈다. '메이너 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물이 주인인 새로운 세상을 시작했다. 돼지들은 글을 깨우치지 못해 7계명을 다 읽지 못하는 동물들을 위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로 요약해주었고 양 떼들은 수시로 저 말을 내뱉었다. 존즈가 돌아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았으므로 공공의 적인 인간은 동물농장 안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주었다. 돼지들은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존즈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지를 물으며 은근슬쩍 넘어갔다. 동물들이 의심쩍어하면 기록된 증거가 있으면 가져와 보라는 말을 했다. 글을 잘 읽지도 못하는 동물들에게 기록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7계명의 내용을 의심하면서도 동물들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며 약간 변한 계명을 진작에 알지 못했음에 민망해했다.
주말마다 함께 하던 공동체 회의에 돼지 나폴레옹이 참석하는 횟수가 점점 줄다가 결국 회의를 폐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회의는 대표자들만이 참석하는 비공식 회의로 바꾸고 결과는 통보한다는 방식이었다. 젊은 식용 돼지 4마리가 7계명을 근거로 반대하자 나폴레옹을 경호하던 개들이 나와 그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나폴레옹이 인간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7계명을 어기려 할 때에도 식용 돼지들이 나섰지만 그들은 개들 앞에서 이미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폴레옹은 인간에게 사기를 당했다. 분한 마음에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했지만 이미 도망간 인간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허무한 말이었다.
실제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선두에 섰던 동물은 돼지들이 아니라 말 복서였다. 복서는 힘세고 성실하지만 머리가 좋지 않은 말이었다. 7계명을 스스로 읽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지만 결국 알파벳 A, B, C, D 외에는 외울 수가 없었다. 글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는 리더인 돼지 나폴레옹을 믿었다. 나폴레옹이 하는 말은 모두 옳다는 그의 철칙은 그가 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간간이 나폴레옹의 말에 찝찝한 느낌이 들긴 했으나 곧 자신의 불손함을 반성하며 명령에 더 열심히 복종했다. 동물들은 혁명을 일으키기 전보다 크게 나아지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농장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나서 일을 했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인 삶은 현실의 힘듦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이 진정한 주인인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지만 동물들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복서는 평생을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동물들보다 더 빨리 일어났고 더 늦게까지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몸에 윤기가 없어질 때쯤 결국 일을 하다가 쓰러졌다. 며칠 쉬고 나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회복이 더뎠다. 돼지들은 복서를 시내 동물병원에 보내 요양을 시키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앨프리드 시몬즈, 말 도살업 및 아교 제조업, 윌링던 소재. 가죽과 골분도 취급함. 개집도 공급>이라고 적힌 트럭에 실려 보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당나귀 벤자민은 흥분하며 외쳤지만 이미 트럭은 멀리 떠나고 난 뒤였다. 이 책을 세 번째 읽고 있지만 복서의 마지막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먹먹하다. 나는 내가 복서와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람을 믿으면 성실한 삶이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판단을 얼마나 믿으며 살고 있을까. 나는 복서를 넘어서서 성실할 수 있을까. 계속된 질문이 마음속에 남았다.
동물농장 안에는 착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농장의 주인이라는 동물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과 동급이라 믿는 돼지들, 인간은 동물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독자들까지 모두가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착각은 진실을 덮어 진실처럼 떠돌아다녔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돼지들은 계명을 조금씩 바꾸었고 무력으로 위협했으며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점점 인간을 따라 하는 돼지들은 결국 인간이 됐을까. 함께 술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던 돼지들과 인간들을 보며 누가 돼지인지 누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말로 소설이 마무리가 된다. 돼지도 인간도 첩첩이 쌓인 착각 속에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주인일 수 없는 농장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닐까.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고 1991년 소련이 다시 해체가 되었다. 메이너 농장이 동물농장으로 그리고 다시 메이너 농장이 되는 과정이 러시아의 역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초판 일이 1945년이다. 소련이 다시 러시아로 바뀌기 전인데도 농장의 이름이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이 신기하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동물농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집권하는 기간을 늘리기 위해 헌법을 바꾸고 수없이 무력으로 위협하며 서로를 속고 속이며 역사가 흘러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속에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글자는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복서가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농장이 좀 바뀌었을 것이다. 복서가 찝찝해하는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그렇게 막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개들이 무력으로 식용 돼지를 겁줄 때 다른 동물들이 동참해서 도와주었다면 식용 돼지들이 기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그랬다면 농장의 주인은 정말로 동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일까. 복서의 마지막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한 눈에서 흐르는 허무한 눈물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그리 살고 싶진 않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