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아신다
맞벌이 부부셨던 부모님은 1남 2녀를 두셨다. 어릴 때 우리는 각자의 나이로는 세상이 감당이 안돼 머리 숫자를 셋으로 합쳐 헤쳐나갔다. 셋이 같이 다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에는 엄마가 써준 감기 증상 쪽지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요"를 목에 걸고 셋이서 손을 꼭 잡고 병원에 갔고, 쥐가 나오던 집에 살 때에는 한 방에 나란히 누워 머리맡에 있던 쥐테이프에 쥐가 붙어 우는 것을 들으며 같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셋이 함께여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생활이었다. 내 옆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있었다. 같이 놀다가 싸우고 그러다 혼나는 것이 우리들이 매일 할 일이었다.
세월이 지났다. 남들은 우리를 어른이라 부른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이 어른이라면 우리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우리도 그러려니 하고 산다. 대신 가끔씩 만나면 서로를 방패막이로 하여 나이가 의미 없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어릴 적 말투로 서로를 놀리며 낄낄거린다. 이제 더 이상 함께가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알면 알수록 우리 안의 어린아이는 서로를 더 보고 싶어 한다. 부모님은 이런 우리들을 그저 바라봐주신다. 이제 제법 자리 잡은 우리의 눈가 주름이 부모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듯하다.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었지만 목적지에 대한 설렘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가족 여행에서 장소는 거의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수속을 밟으면서 우리는 별것 아닌 것에 웃었다. 여행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주어진 시간에 맞춰 주어진 공간을 둘러보았을 때도 서로를 보며 손잡고 걸었을 뿐이다. 어디를 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웃고 떠든 기억만 남는다. 부모님은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시고 우리는 너무 쿨한 부모님을 안주삼아 쑥떡거리며 철딱서니 없이 웃고 또 웃었다.
패키지여행이라 다른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우리 셋은 차 속에서는 어른이었다가 나오면 어린아이가 되기를 반복했다.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닌 듯 각자의 어린아이는 상황에 따라 잘 달래졌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그 가족이 여행이 이어지면서 익숙해지고 간간히 말도 주고받았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다가 마주칠 때에는 괜히 반갑기도 했다. 비가 조금씩 오던 날, 가이드는 우리를 배에 태웠다. 뱃사공은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이셨는데 나지막한 목소리에 내 마음이 다 쏠렸다. 뱃사공이 익살스럽게 불러주시는 재미있는 일본 노래는 낯선 두 가족이 함께 있어도 내 안의 어린아이가 튀어나올 정도로 편안했다. 소박하고 담백했던 그 시간의 느낌은 아마도 오래 생각날 듯하다.
가이드는 여행에 들뜬 우리들을 고깃집으로 데리고 갔다. 고기와 고봉밥이 나왔다.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좀 당황했다. 밑반찬이 한국과 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도 없을 줄은 몰랐다. 다행히 당황스러움과 배고픔은 다른 회로로 작동을 하는 것인지 금세 적응을 하고 각자 배당받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흰쌀밥에 고기를 얹어 입에 넣었다. 고기의 고소함과 밥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 날에는 우동집에 갔다.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우동이 나왔다. 여전히 반찬은 없었다. 우동집에 우동이 나오면 됐지. 일본 생활 2일 차답게 우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동을 먹었다. 우동을 먹고 나오며 일본인들이 본질에 최선을 다한다는 가이드의 말 뜻이 이해가 됐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고 우동은 진심으로 쫄깃했다. 그것 외에 뭐가 필요한가.
가족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외에 누가 더 필요한가. 차를 타기 전에 멀미를 하는 언니를 앞 좌석에 앉히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뷔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많이 챙겨 온 동생을 보고 한참을 웃다가 배탈이 날 것을 염려하여 동생 아이스크림을 일부러 반쯤 덜어가는 배부른 언니를 보았다. 여행 와서도 일을 해야 하는 동생의 피곤한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밝아지는 것도 보았다. 한자를 읽고 싶어 발버둥 치는 나를 위해 옆에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같이 읽어주는 엄마를 보았다. 그렇게 나는 낯선 일본에서 가족들을 여행했다. 내가 갔던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본 것은 있다고 말할 수 있어 여행 후기를 적는다.
우리 가족은 서로 상대를 바꿔가며 평생을 같이 놀고 싸우고 화해하며 지냈다. 각자의 마음속에 애정과 상처가 남아 가족이란 단어를 좀 더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꽃길만 같이 걸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족은 멋모르고 세상에 태어나 홀로 설 때까지 함께 있어주었던 고향이었다. 어른이 된 어린아이가 외롭지 않게 가끔씩 불러주는 오래된 친구이기도 하다. 우린 이제 늘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른의 '함께'는 '따로'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여행이 끝난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또 마음 편히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조금은 더 어른스럽게 지내야겠다. 뱃사공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