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좀 할게요

선물

by 마나

“마나, 부탁이 있어요.”


어느 날 여름이가 나를 찾아왔다. 원래도 부끄럼이 많았지만 그날은 유독 쭈뼛거리며 멋쩍어했다. 순진한 여름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편하게 말해보라는 뜻으로 몸을 돌렸다. 여름이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구멍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와 나 둘밖에 없다, 이놈아.’라고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름이는 당황한 상태지만 이 어색한 상황을 헤쳐나갈 열쇠도 본인이 들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크게 한숨을 쉬고 용기를 내어 나를 쳐다봤다.


“내 인터뷰이가 되어 주세요.”


순간, 국어 교사인 파파야가 학기 초에 한 사람을 인터뷰하고 발표하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주겠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인터뷰이는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 어떤 사람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 여름이의 긴장한 눈빛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딱히 거절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웃으며 좋다고 했다. 그제야 여름이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아직 산 넘어 산이 남아 있지만 일단 인터뷰이를 섭외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는 듯했다. 나도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여름이의 섭외 성공에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좋았다. 되돌아가는 아이의 어깨가 가벼워 보였다.


인터뷰는 한 달 전에 진행됐다. 미리 질문지를 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준비된 답이 아니라 질문을 듣고 바로 하는 답을 받고 싶단다. 부끄러워하는 것과는 달리, 해야 할 말은 또 야무지게 잘하는 여름이다. 뭔가 분위기가 역전됐다 싶기도 했으나 나도 뭐든 상관없었다. 여름이와 나 사이에 녹음기를 두고 대화가 시작됐다. 나는 주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을 했다. 처음에는 준비된 질문만 하던 녀석이 시간이 지나며 슬쩍 꼬리질문도 집어넣었다. 나도 여름이의 꼬리가 재미있어 그대로 따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에 신경 쓰이던 녹음기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1시간을 꼬박 이야기했다. 나중에는 인터뷰가 약간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둘 다 괜찮았다.

오늘이 발표날이었다. 교사들은 관중의 역할을 해달라는 파파야의 부탁을 받긴 했지만 내가 있는 것이 여름이에게 부담을 더 주는 건지 덜 주는 건지 알 수 없어 주저되었다. 여름이에게 물어보자니 이미 떨고 있는지라 고민 하나 더 얹어주는 것 같아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여름이의 상태와는 달리 나는 발표가 궁금했다. 호기심은 내가 들어가고 싶다는 증거였다. 다른 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마지막으로 일어서며 ‘에라 모르겠다’를 속으로 외쳤다. 교실에 들어서자 여름이와 눈이 마주쳤다. 편하게 하라는 의미로 씩 웃었다. 긴장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학생들의 발표를 듣고 있자니 지금 이 시간을 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까웠다. 스스로를 알고자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성숙함이 느껴졌다. 발표가 끝난 후 예아트는 실제 인터뷰이는 4명이었지만 8명의 인터뷰를 본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학생 각자가 만든 질문은 상대를 향한 질문이자 스스로 답을 찾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인터뷰를 하며 혼자서는 찾지 못한 질문에 하나의 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려 애썼다. 예아트 말씀대로 오늘 국어 시간에는 8명의 인터뷰이가 있었던 것이 맞았다.


여름이도 잘했다. 발표를 통해 여태 꾸려왔던 내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교사로 살면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난감하다는 여름이는 나에게서 결정을 잘하는 방법을 찾고 싶은 듯했다. 정답을 알 리가 없기에 대신 내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몰랐는지를 이야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견과류인 것을 안 것도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였고 내가 꽤 많이 썼던 ‘나는 뭐든 괜찮아요’라는 말속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해 잘 몰라 답답해하는 것 자체가 내 눈에는 대단해 보이기 때문에 고민하다 보면 하나씩 알게 되더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실제로 나도 그렇게 나를 배웠고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여름이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어눌한 행동에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나도 편안했다. 발표가 끝난 후 여름이에게 귀한 선물을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씽긋 웃어 주었다. 편안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지금 나는 받은 선물을 자랑하고 싶어 글을 쓴다. 이 글이 좋으면서도 어색한 것은 겸손이 미덕인 사회에서 자랑은 밉상이라 찍히기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글을 쓰고 싶은 나에게 이런 마음은 여태 반쪽짜리 글만 쓰게 했다. 미덕이 아니라 걸림돌이었다. 여름이의 선물을 다시 꺼내 본다. 그래, 나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한 권의 사람책이다. 고쳐야 할 부분만큼 분명 잘하는 것도 있다.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다시 다짐해 본다. 오늘 나의 자랑에 누군가가 조금은 부러워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긴다. 나의 유치함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기를, 그래서 속에서 곯아가는 것 대신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 사라져 주길 바란다. 나 오늘 선물 받았다.


* 대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인포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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