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일1선택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Jun 04. 2024

닮고 싶지 않아서

조지 오웰의 책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말의 이름은 복서다. 우직하고 성실하지만 영리하진 못한 말.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은 책이라 복서의 마지막 장면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일부러 글 읽는 속도를 늦추곤 했다. 그런다고 이야기가 변하진 않겠지만 상황을 바꾸고 싶은 내 마음이라도 달래고 싶어서였다. '권선징악'이라더니 옛말은 죄다 헛말이었다. 끌려가는 복서를 보며 나는 사악한 돼지 나폴레옹 대신 멍청한 그를 욕했다. 애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마음이었다. 그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나와 복서가 닮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 이유이기도 했다.


고단한 그의 인생은 싫었지만 그는 좋았다. 선하고 착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며 사는 그가 제대로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동물들도 그와 함께라면 힘든 노역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만약 그가 지금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의심하며 살 수만 있었더라면, 돼지 나폴레옹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만 있었더라면, 아니면 주변 동물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함께 의논만 했더라면 복서도 덜 답답하게 살지 않았을까. 알파벳 A, B, C 외에는 외워지지 않는 지능이라 하더라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당나귀 벤자민이 그의 편이었다. 사람, 아니 동물 볼 줄 아는 눈만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복서를 생각할 때마다 '만약에 ~수만 있었다면'이란 표현이 수십 개가 떠올랐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스스로 복서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사는 법을 모르므로 내가 운영하는 인생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판단할 눈이 없었다. 다행히 남을 해치려는 마음 같은 건 없지만 잘못 길을 들이면 내 성실함이 남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무작정 달리는 폭주 기관차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복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닮긴 했지만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라고 해석했다. 그래, 모두의 인생이 다르니 내가 복서같이 살 필요는 없지. 나는 책을 몇 번 읽고 나서야 복서와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목에 걸려 있던 그의 이야기도 서서히 소화가 되는 듯했다.


오늘, 복서를 선물로 받았다.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복서가 그림 속에 있었다. 다른 말을 보고 그린 엄마의 그림이지만 복서라고 이름 붙여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슬픈 눈빛과 뜨거운 입김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 말의 모습에서 내 어두운 눈빛과 무거운 어깨가 보였다. 아직도 그와 내가 완전히 떨어진 게 아니었나 보다.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복서에 대한 내 마음을 아는 엄마는 나에게 그림을 주시며 말 이름이 '복서'라고 했다. 나는 '복서'가 반가워 피식 웃으며 엄마를 꼭 껴안았다. 내가 보는 내가 밉고 슬퍼 보이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안아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엄마는 '복서'를 그리는 내내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그의 목과 턱 근육은 여러 겹 색을 더해가며 단단해졌고 머리털은 촘촘히 채워졌다. 그가 내게 오기 전까지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꽤 길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도 엄마를 따라 벽에 걸린 '복서'를 보고 또 보았다. 어느 날은 얼굴에 걸린 고삐를 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줄이 얼굴 근육을 당겨 졸린 부분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림을 바꿀 순 없지 않은가. 주어진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내 생각을 바꿔야 했다. 그의 고삐는 열심히 살았던 삶의 상징일 수도 있을까. 고삐가 답답한 건 '복서'가 아니라 나인지도 몰랐다. 엄마의 세심한 그림 솜씨에 나는 그림이 사진인 듯 '복서'가 복서인 듯 그렇게 혼자만의 상상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그림을 보며 복서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와 닮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좀 더 편안하게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선함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복서'의 단단한 근육을 보며 느낀다. 나도 열심히 운동하며 살고 있으니 내 몸 어딘가에 내가 찾지 못한 말 근육 하나쯤은 붙어 있겠지. 오늘 내가 한 선택들이 괜찮았는지를 의심해 본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진 않았는지도 챙겨본다. 먼 훗날이라도 '나는 복서와 달라!'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복서가 놓쳤던 주변 동물들의 말을 주워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열심히'의 끝이 허무하지 않기 위해 내 고삐는 스스로 잡아본다. '복서' 안에 조지 오웰과 엄마 그리고 나의 시간이 쌓인다. 그것 자체로 이미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전 08화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