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올림픽
올림픽 경기는 참 이상하다. 처음에는 경기 규칙도 모르고 시큰둥하지만, 방송을 보다 보면 점점 흥분 게이지가 올라간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뭔가는 알 것 같은 그런 느낌. 시간이 지나, 캐스터의 반복된 설명을 들으면 까막눈이 서서히 눈을 뜬다. 규칙을 알고 보면 선수들의 표정과 관중들의 환호가 더 이해된다. 나도 당당하게 그들 중 한 명이 될 때쯤 우리나라 선수들이 결승전에 올라오면 최고다. 며칠 동안 나는 마치 원래 팬이었다는 듯이 속에 있는 흥분을 다 드러냈다. 이런 나를 보고 있으니 어디 가서 올해 올림픽이 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남자 펜싱 경기 단체전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경기 규정도 몰랐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선수들은 후다닥 뛰어서 상대방을 칼로 찌르고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내 눈에는 똑같이 찌른 것 같은데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 순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들의 환호성이 이상해 보였다. 그저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게 중요한가 보다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우리나라의 점수가 점점 올라갔다. 캐스터의 목소리 데시벨도 덩달아 바뀌었다.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그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쯤 되니 나도 뭐가 뭔지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돋보기를 끼고 경기를 본다는 심정으로 더 열심히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에 집중했다.
올림픽 대회 초반에 오상욱 선수가 펜싱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 내 호기심의 시발점이었다. 그 다음에 치러진 단체전 8강부터는 경기 규칙도 거의 익힌 상태라서 경기를 보는 맛이 더 났다. 펜싱은 한 번에 한 사람에게만 공격권이 있었다. 그래서 한 명이 공격을 하면 나머지 선수는 방어를 해야 했다. 공격에 실패하면 바로 역공격이 들어왔다. 공수의 순서를 지키는 모습이 멋있었다. 펜싱은 순발력과 빠른 판단력이 중요해 보였다. 짧은 순간에 이뤄지는 기술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뒤에 느린 동작으로 보여주니 이해가 잘 되어 좋았다. 더는 선수들의 환호성이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8강에서 부진했을 때 심리적으로 어땠나요?”
“개인전이었다면 저는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단체전이라 동생들 믿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거예요. 8강 끝나고 동생들에게 많이 혼났어요. 잘 못해도 괜찮으니 주눅 들지 말고 우리를 믿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생들이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경기를 보지 않고 인터뷰만 봤다면 뻔한 질문에 준비된 답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체전 경기는 선수의 말 그대로였다. 개인전과는 달랐다. 서로서로 보완하는 느낌이었다. 한 선수가 잘 못하고 내려오면 다음 선수가 더 힘을 내어 점수를 채웠다. 앞 선수 경기에 흔들려 영향을 받을 법도 한데 그 반대였다. 나를 믿고 힘내라는 의미로 내려오는 선수를 다독이며 자신이 책임감을 더 느끼고 경기에 임했다. 올림픽 경기는 선수들이 4년 동안 준비해서 나온다. 그 떨리는 자리에서 동료를 챙기며 나를 믿으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선수가 몇 명이 될까. 개인전만을 준비해서는 생기기 힘든 마음임은 분명했다. 단체전을 보며 서로서로 믿고 의지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펜싱에 ‘ㅍ’자도 모르던 나였지만 이번 올림픽을 통해 펜싱 결승전이 새벽 3시 35분에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알람을 맞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자다가 일어나 ‘대한민국’을 외쳤다. 다음 날을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지만 가끔은 내 안의 똘기를 발산하는 게 살맛을 제대로 느끼고 사는 거라 생각했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너무 잘했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말하자면 0.01초 사이에 판단해서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종목인데 우리 팀이 헝가리 팀보다 0.001초 더 빠른 듯했다.
0.1초, 0.01초, 0.001초.
눈 한 번 깜박거릴 때도 1초가 걸리는 나는 선수들의 말도 안 되는 순발력에 머릿밑이 가려울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얼마나 연습해야 저렇게 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저 정도의 반응을 할 수 있는 건 넘어져 다쳤을 때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시상식에서 활짝 웃는 선수들의 모습을 봤다. 0.1초를 위해 수십 년을 보내는 그들의 시간이 금메달을 목에 걸며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웃으며 하품을 했다. 오늘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 응원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올림픽 게임을 보고 있으면 재미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선수가 인터뷰에서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최선이 경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메달을 딴 선수보다 그렇지 못한 선수들이 더 많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닐 것이다. 잔인하게도 인생은 마음 같지 않아서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기회는 온다고 했다. 선수들에게는 올림픽이 그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에서 나같이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준다면 각자의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버틸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직 올림픽 게임이 많이 남았다. 이름 모를 선수들에게 떨리겠지만 응원하겠다고 말해 주고 싶다.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