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뉴욕 가족 여행
공원 구석에서 구슬픈 한국 음악이 들렸어. 산책을 하고 있던 언니와 나는 땡볕을 벗어날 겸 버스킹 하는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지. 한 동양인이 아쟁 같은 악기로 연주를 하고 있었어. 처음에는 그저 반갑기만 했는데 음악을 계속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라고. 타국에 오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지만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일 리는 없었어. 내 서러움의 깊이를 아는 나는 겸연쩍게 눈물을 닦았어. 그리고 얕은 마음까지 살펴주셔서 감사하다고 속으로 되뇌며 버스킹 값을 지불했지. 덕분에 돌아오는 길은 더 힘을 낼 수 있었어.
숙소에서 센트럴 파크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면 30분 이내에 도착한다고 했어. 여행 동안에 동생과 내가 가족들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동생이 아침 일찍 나가 공원에서 자전거를 먼저 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나머지 식구들에게 길을 안내할 차례였지. 심각한 길치인 내가 일본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살짝 길눈을 뜬 것을 식구들은 알아주는 듯했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 나도 그만큼 유능한 길잡이가 되고 싶어 열심히 지도를 들고 고군분투 했던 것 같아. 내가 한눈을 팔면 네 명이 동시에 다시 움직여야 했으니까. 공원으로 가는 내내 나는 지도와 표지판을 보고 또 봤어.
공원에 도착하면 긴장을 풀어도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길 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더라고. 똑똑했던 지도가 공원 안에서는 잘 맞지 않았거든. 방향을 알 수 없어 헤매는 순간 불안감이 바로 따라왔지. 거기에 부모님을 땡볕에 오래 모시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묵직하게 더해졌고 말이야. 내공이 부족한 길잡이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만큼 시야도 흐려지는 듯했어. 열심히 동생과 약속한 장소인 키오스크를 찾으려고 주변을 맴돌았어. 지도상에는 얼마 못 가 약속 장소가 나온다는데 실제로는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더라고. 당황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퍼졌어. 옆에서 언니가 내게 뭐라고 말을 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지. 동생을 만나 다시 시간 계획을 짤 때까지 붕 뜬 마음은 계속 됐어.
앞에서 팔딱거리며 길을 찾은 나도 애를 썼지만 그 뒤에서 마음 졸이며 따라오는 사람들도 에너지가 들긴 마찬가지였어. 공원에 온다고 이미 어느 정도 체력을 소진한 부모님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벤치에서 쉬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동안 언니와 나는 공원 산책을 하기로 했지. 천천히 걸으며 조금 전 소용돌이친 감정을 추슬렀어. 서서히 언니의 말이 들리는 걸 보니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중인가 보다 했어. 버스킹 노래는 곡조가 구슬퍼서 길잡이의 서러움과 꿍짝이 잘 맞았어. 내 상황을 이해한다고 말해주는 듯했거든. 나는 돌아갈 힘이 생길 때까지 음악에 기대어 청승을 떨었어. 한숨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지.
다시 부모님이 계신 쪽으로 돌아왔어. 지루해하실 것 같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초상화 그림 그리는 곳에 계시더라고. 엄마가 모델이었고 아빠가 화가 옆에서 눈이 닮았다는 둥, 더 젊어진 것 같다는 둥 그림 그리는 과정을 생생히 중계하고 계셨어. 우리도 곧장 아빠와 합류했지. 엄마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 아빠 그림이 시작될 때에도 마찬가지였어. 그림은 완성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지루해하는 낌새 없이 점점 더 즐거워하셨어. 여행을 온 후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셨던 아빠가 그 순간만큼은 활짝 웃으시더라고. '다행이다... 다행이다...' 소리가 속에서 절로 나왔어.
식구들은 내가 있어 도움이 됐겠지만 없어도 잘 지내고 있었어. 홀로 지고 있는 이 과도한 책임감은 도대체 누가 내게 얹은 거지? 나는 딱딱한 어깨를 주무르며 아빠 엄마의 싱글거리는 표정을 봤어. 내가 원하는 게 딱 저거다 싶더라고. 그럼, 식구들이 내게 바라는 것도 같지 않을까. 일하러 온 거 아니잖아. 가족 여행이니 몸에 힘 좀 빼고 길잡이 역할을 해도 되지 않을까. 큰 돌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 가족들에게 말하면 "당연하지! 제발!"라고 말할 것 같았어.
잠들기 전에 언니가 아까 낮에 키오스크 저기에 있다고 여러 번 말한 거 들었냐고 묻더라. 내가 제대로 길을 못 찾고 있을 때 옆에서 언니가 찾아서 말해줬는데 나는 그 도움을 받을 여유조차 없었던 거지. 답답했던 마음을 이제야 털어놓는 언니를 보며 한참을 웃었어. 그리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구나 싶어 안심도 됐지. 그러게, 나는 왜 못 들었을까. 바로 옆에서 말했는데 말이야. 내 반응에 어이없어하는 언니를 보며 동생이라 괜찮다는 말을 해대며 그냥 우겨 넘겼어. 착한 언니는 또 그걸 바로 받아줬지. 우리 사이엔 동생이 갑이었어.
여행을 하면 내 안에 있는 날것들이 튀어나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은 자석처럼 불안감을 잡아당기니까 말이야. 나도 모르는 내 모습에 가려 낯선 곳은 더 흐릿해져. 자세히 보면 여행 대부분은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구경하는 거잖아. 그 쉬운 것들이 어려워지는 이유도 선명하지 못한 시야 때문이 아닐까 싶어. 처음 가보는 길, 처음 먹어보는 음식 앞에서 지레 겁먹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 모습도 귀엽게 봐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내일도 나는 초보 길잡이야. 과도한 책임감 따윈 쥐고 있지 않다는 거 알지? 식구들에게 짐도 맡기고 도움도 받으며 마음 편히 해보자고.
대문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