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뉴욕 가족 여행
아빠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어. 살짝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계셨지. 더운 날씨에 모자를 쓰지 않고 밖에 오래 계셔서 그런 듯했어. 우리는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인근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과 아이스커피를 샀어. 사람이 많은 관광지라 커피 사는데도 20분이 넘게 걸리더라고. 기다리다 지쳐 나도 점점 멍해지고 있었어. "더워!"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날이었지. 여행 온 지 고작 이틀째였어.
잠깐 그러다 말 줄 알았는데 아빠의 얼굴에는 매일 조금씩 붉은 끼가 남아있었어. 그래도 상태를 여쭈면 괜찮다고 하셔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 여행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짜증을 내시는 아빠를 놀라서 보니 그제야 내 눈에 붉은색이 선명하게 들어오더라고. 속으로 덜컥 겁이 났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차를 탔지. 그리고 내일은 무조건 아빠를 쉬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
다음 날도 덥긴 마찬가지였어. 식구들은 의논을 해서 그날은 체력이 달리는 나와 아빠는 숙소에서 있고 나머지는 계획대로 여행을 하기로 했지. 쉬기로 결정하고 나니 몸이 더 노곤해지더라고. 실상은 내가 쉬고 싶어서 같이 쉬자고 아빠를 꼬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니까. 아빠와 나는 오후 3시에 숙소 근처에 있는 해밀턴 공원에 산책을 가기로 하고 그때까진 각자 방에서 다시 쉬었어. 여행 와서 처음 가지는 여유라 조용한 시간이 다디달았지. 나는 침대 깊숙이 파고들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들었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침대의 단맛을 만끽하는 중이었어.
덕분에 오후 3시엔 둘 다 당 충전이 완료가 됐어. 우린 공원에 들렀다가 맛집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짠 후 숙소를 나섰지. 여행 오기 얼마 전 아빠가 새로 장만하신 무선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말이야. 내가 자꾸 이어폰을 떨어뜨려서 혼자 들으시라고 드렸는데도 아빤 두툼한 손가락으로 애써 다시 내 귀에 이어폰을 꽂으려 하셨어. 순간, 함께하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잡음 없이 내게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나도 더욱 귀에 힘을 주고 이어폰을 장착했지. 우린 가수 린이 부르는 트로트를 들으며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어. 두툼한 손이 내 손을 감싸고 있어 든든했어.
15분 정도 걸으니 해밀턴 공원이 나왔어. 공원에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허드슨 강과 건너편에 있는 뉴욕의 빌딩숲을 구경하고 있었지. 어제 뉴욕 시내를 걸으며 봤던 건물들이었어. 작은 장난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가까이에서 볼 때는 너무 커서 뭐가 뭔지 헷갈렸는데 말이야. 우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찾아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 아빠는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포즈를 취하셨지. 갑자기 내 카메라 렌즈가 뿌옇게 흐려졌어. 쉬길 잘했다 싶었어.
"체력이 예전만 하지 않네." 아빠가 벤치에 앉아 허드슨 강을 보며 말씀하셨어. 씁쓸해하시는 아빠 마음이 느껴지긴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힘들면서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듣기가 편했어. 아빠도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에 말씀하실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지. 그래, 우린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 제법 든든히 먹은 나이에도 아빠와 딸이 이어폰 하나씩 나눠 끼고 산책할 정도면 잘 살고 있다는 뜻 아닐까. 나는 세월의 허무함을 잘 받아들이고 싶었어. 그래서 공원을 나오며 허드슨 강과 뉴욕 그리고 아빠와 나를 눈으로 다시 찍었지. 살면서 가끔 체력이 달릴 때 지금의 편안함을 꺼내어 보면 좋을 것 같았어.
여행은 한 치 앞을 못 보는 시간이 맞는 것 같아. 다정하게 공원에서 놀던 우리는 식당을 찾다가 의견이 달라 곧장 투닥거렸으니까. 땡볕이 문제였지. 결국 가고자 했던 음식점은 포기하고 숙소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어. 당연히 음식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지. 떨떠름하게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어.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꽉 차 있던 어색한 기류를 뚫고 서로를 쳐다봤지.
눈빛 교환은 우선 한 입 더 먹어보자는 무언의 신호였어. 음식이 정말 맛있더라고.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거였어. 우연히 찾은 맛집이라 더 반가웠지. 같이 밥 먹으며 정든다는 말은 맞는 말이야. 더군다나 맛까지 있으니 삐친 마음이 살살 녹더라.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식당을 나왔어. 처음과 끝이 같다면 중간에 있던 우여곡절쯤은 잊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 9시에 해가 지는 뉴욕의 하늘은 늦은 오후에도 여전히 화창했어. 아빠와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