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그리고 사람

태백 한달살이 : 시시한 책방 북스테이

by 마나

서점에 살면 심심할 틈이 없어. 겉은 조용하고 한적한데 속은 시끌시끌하거든.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사람이야. 글쓴이의 온 마음이 들어 있지. 마음의 무게는 원래 무거운 건가 봐. 작은 책도 하나같이 묵직한 걸 보면 말이야. 서점에 꽂힌 책들 모두 표현 능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충 만들어진 건 없어. 그래서 나도 허투루 책을 다룰 수 없지. 또, 다 달라. 생각은 같은데 표현이 다르기도 하고 표현이 같은데 문맥상 속뜻이 반대인 경우도 있더라고. 서점에는 이렇게 매력적인 책들로 매일 북적거려. 그러니 실제로 책을 닮은 사람을 보고 마음이 동하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서점 안에 있으면 모든 책을 읽고 싶은 욕심이 올라와. 그럼, 책의 개수만큼 마음이 바빠지지. 이럴 때 제일 필요한 게 자기 객관화야. 나는 다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다며 욕심이 사그라들 때까지 되뇌어야 해. 그럼 기가 죽어 잠시 책을 포기하기도 하지. 그래도 얼마 못 가 다시 책을 들어. 의기소침해진 나를 달래는 방법도 결국 책 외엔 없다는 걸 아니까 말이야. 서점은 조급한 나를 수련하는 장소인 것 같아. 아무리 바빠도 글은 한 글자씩 읽을 수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거지.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 나를 맞추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글이 그림으로 바뀌어. 그때가 책에 깊이 빠지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어.


오늘 아침엔 숙소에 있던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어. 책은 붉은색 책표지부터 시작해 글자 한 자 한 자까지 모두 엄마의 모성애를 담고 있었지. 그래, 세상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보다 더 열정적인 게 어디 있겠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 나는 어느 정도까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는 뭐고 자식은 뭘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자식은 모자란 만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알 듯했어. 소설을 읽는 내내 엄마의 모성애가 빨간색으로 변해 아득하게 내 주위를 맴돌았어. 덕분에 종일 어수선했지. 오늘 하루는 엄마의 붉은색에 스며들다 끝나겠다 싶었어.


이런 날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열을 식힐 필요가 있었어. 마침 서점에 저녁 필사 모임이 있다더라고. 주인은 원하면 참석해도 된다고 하셨지. 설명을 들으니 느슨한 모임 같았어. 정해진 틀이 없었거든. 필사를 주로 하긴 하지만 책만 읽어도 되고 또 필사하는 책과 방법도 다 각자 선택하면 됐어. 마지막은 각자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말이야. 그때도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됐어. 나는 느슨한 게 마음에 들었어. 정해진 게 없는 곳에서는 내 빨갰던 하루도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겠다 싶었거든. 그래서 참석을 했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책을 읽고 있었어. 그들은 각자의 책에 집중하느라 내 책엔 관심이 없었지. 울그락불그락하는 나에겐 딱 필요한 무관심이었어. 혼자일 땐 내 손에 든 책이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크게 느껴졌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니 아닌 걸 알겠더라고.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어. 그래서 편하게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더 안으로 파고들었지. 우린 책장 넘기는 소리, 숨 쉬는 소리, 연필 소리를 공유했어. 함께인데 혼자였고 혼자인데 함께인 순간이었어.

한 사람은 일주일 뒤에 갈 폴란드 여행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어. 세계에서 제일 많은 침략을 당한 나라라 현재의 모습이 더 궁금하다더라고. 한강 작가가 폴란드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글을 적으셨다는데 그 이유도 알고 싶고 말이야. 여행 가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그래서 나도 덩달아 호기심이 생겨 다시 볼지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여행 다녀와서 찾은 답을 알려달라고 했지. 한 사람이 품은 질문이 나에게로 와 어떤 의미로 발현될지는 두고 보면 될 일이었어.


다른 분은 한승원 작가의 '추사'라는 책을 읽는 중이었어. 정조 대왕이 승하하신 후 서서히 몰락하는 시대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의 삶을 다룬 작품이었지. 그는 우연히 '초의'라는 작품을 읽으며 그 시대 상황을 알게 됐고 연결된 시간을 그린 책 '추사'를 연속해서 읽으며 조선이 망하게 된 뿌리가 그때 시작되었다는 걸 배웠다더라고. 시대를 따라 책을 선택하는 게 인상적이었어. 이후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책을 연결해서 읽는다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지. 잘 모르는 시대를 자세히 설명해 줘서 나도 흥선대원군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운명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어.


오늘 나는 서점 안에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울다가 폴란드 구경도 하고 한국 역사 이야기도 들었어. 잘 이어지지 않을 듯한 소재들을 책을 통해, 사람을 통해 엮어갔지. 모든 책은 흐르고 흘러 결국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어.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정성스러우면서도 개성 있어 보였거든. 딱 책을 닮았더라고. 이런 다양한 모습이 모여 서점이 운영되고 있구나 싶었어. 그래서 내가 여길 좋아하는구나 싶었고. 그들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도 책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시 생각해도 책장에 꽂힌 책 모두를 읽진 못할 것 같아. 생각만으로 한숨이 나오거든. 대신, 한 권을 읽더라도 허투루 보지 않는 게 느린 나에겐 더 맞을 듯해. 한 권의 책에는 한 사람이 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매일 아침 소리 없이 떠들썩한 서점을 느껴. 내일은 이들 중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아직은 온몸에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으니 남은 여운을 더 느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네. 매일 한 자씩 읽는 중이야.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서 말이야. 이게 내가 살아가는 속도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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